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선 Jan 10. 2018

실연에 대한 이야기

백영옥,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모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지금도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을 끝내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인데, 막상 내 주변에서 별로 일어나지 않고, 또 나의 상황은 유부녀인지라 사랑의 시작도 끝도 별로 반갑지 않은 현실이다. 


최근 결혼을 했고, 또 그전에 3년 동안 지금의 남편과 사귀어서 나에게 실연은 서랍 깊숙한 곳에 먼지를 쓰고 앉아있는 경험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이 내놓는 실연의 정의는 '연애에 실패함'이지만, 나는 좀 더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고 싶다. 


失戀. 

잃을 실에, 그리워할 연을 쓴다. 

그리움을 잃어버리다, 가 실연의 한자 그대로의 뜻이다. 


흠, 그렇다면 사실 실연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도 있겠다.

그리움을 자발적으로 잃어버린 사람과, 그리움과 비자발적인 친구가 된 사람. 


2.

내 첫 연애의 끝은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나는 차였다. 

그런데 좀 예쁘게 차였던 것 같다. 

1년 반을 사귀었던 전 남친은, 서울에서 수원까지 날 데려다주었고, 이별의 뽀뽀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는 헛짓거리겠지만. 


너무 예쁘게 차인 후유증이었을까, 나는 한동안 그에게 반갑지 않은 전화를 자주 했다.

스팸 문자를 가장해 미련을 담은 문자를 보낸 적도 있다. 


그러다가 어떻게 끝났더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게 끝이었을 거다. 

그렇게 약 4년간의 짝사랑 기간이 시작된다. 

짧게 좋아한 사람까지 합치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나는 금사빠였다. 


나는 짝사랑에 실패한 것도 실연으로 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모임>은 내가 읽은 백영옥 작가의 4번째 책이다.

한때 유행했던 '칙릿' 소설의 대명사였던 '스타일', 다이어트 챌린지를 배경으로 한 '다이어트의 여왕', 좋은 문구가 가득했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까지. 

백영옥 작가의 글은 참 술술 읽히고 재미있다. 


이 소설도 재미있었다. 

때로 수사가 과하다고 여겨지는 문장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 소설의 맛이었다. 


4.

소설 속에서는 제목과 동명의 모임이 벌어진다. 

알고 보면 결정사(결혼정보회사)의 기획이지만, 훌륭한 기획자의 손에서 탄생한 잘 만들어진 거짓말은 실연당한 남녀를 아침 7시에 동명의 레스토랑으로 불러들인다.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칼에 베였거나, 화상을 당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다.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누군가로부터의 거절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 26페이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재밌는 건 막상 실연 기간 중일 때는 내가 지금 아픈 이유가 실연 때문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 40페이지


실연 모임에 사람들을 부르기 위한 홍보문구다. 솔직히 나는 이 정도로 고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다. 아, 지금 남편이랑 헤어지면 느낄 수 있으려나. 평생 이렇게 날카로운 햇빛의 느낌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겨우 오 분 만에 십 년의 시간이 닫혀버렸다. - 84페이지


그렇다. 일 년을 사귀었든, 십 년을 사귀었든, 이별의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버릴 수 없는 게 아닐까. - 244페이지

끝이 난 게 명확한데도 끝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여지를 남긴 것인지, 내가 미련이 많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마음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게 미련인 걸까.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무의식적으로 밝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대요. 하지만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선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고 충고하더군요. - 276페이지


좋은 문장이다. 코멘트를 달긴 어렵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는 일이에요. 전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어요. 대단한 영감으로 순식간에 걸작을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트루먼 커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데 육 년이나 걸렸어요.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철저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 288~289페이지

어제 남편은 술을 잔뜩 마시고 와서 이불에 토했다. 침대 시트까지 다 빨아야 했다. 결혼 3개월 차. 나는 술을 잘 마신다고 생각했던 그의 새로운 면모를 어제 보았다. 나는 정말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동'해야 했다. 위 문장에서 말하는 연애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연애다. 결혼 같은 연애다. (실제로도 이 대사를 한 인물은 한 여자와 10년 가까이 사귀었다.) 


5.

나의 실연의 역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이 모임의 이름에서 '조찬'을 '만찬'으로 바꿔, 실제로 음식은 나오지 않겠지만 저녁 7시에 진행될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만찬모임'을 진행해보려 한다. 


참석자가 있을지, 궁금하다.


커밍쑨. 



*이 글의 모든 인용구는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모임>(백영옥, 아르떼)에서 인용했습니다. 


<끝> 



글/ 김명선

- 수원에서 심리상담서점 <리지블루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상담신청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고민을 보관해드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