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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Dec 11. 2018

#4.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김해성 님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3인칭 주인공 시점>은 1시간의 1:1 인터뷰 진행 후 짧은 소설을 써드리는 프로그램입니다. 소설은 인터뷰이의 동의를 받아 익명화되어 배포합니다. 현재 베타 테스트 기간 중이며, 2019년 2월에 정식 런칭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베타 테스트 신청은 이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소설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1. 

  눈이 온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다. 예당 무역의 대리 해성은 점심을 먹고 들어와 회사 휴게실에서 믹스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6층 높이의 사무실에서 밖을 바라보면 우산을 쓰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밑에 지나가는 게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중, 해성의 눈길을 사로잡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노란 우산을 쓰고 택시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여자 한 명. 160cm가 될까 말까 한 아담한 키에 회색 코트와 검은 앵클부츠를 신었다. 우산 밖으로 어깨까지 내려온 갈색 생머리가 보인다. 

  ‘혹시…?’

  해성은 잠시 생각한다. 

  ‘설마…’

  여자는 마침 도착한 택시에 올라탄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해성에게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눈 오는 날에 노란 우산을 든 여자일 뿐인데. 하지만 어느새 해성은 8년 전 그날로 돌아가 있다. 


2. 

  ‘어디니?’ 

  ‘저 학생회관 앞이에요. 오빠' 

  평소에도 언덕 때문에 걷기 힘든 학교이지만, 눈 오는 날은 무슨 훈련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원래 학교 안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도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은 운행을 하지 않는다. 정문에서부터 인문대까지 힘들게 걸어올라 왔는데, 소영은 학생회관에 있다고 문자로 답했다.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해성은 학생회관까지 걷는다. 다 와갈 때 즈음, 소영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노란 우산을 쓰고 있는 뒷모습을 보았고, 해성의 인기척을 느끼자 돌아보면서 웃었다. 쿵쿵쿵쿵…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해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입생 새터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똑똑하면서도 허당끼가 있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3.

  “야, 김해성. 나 백 원만 빌려줘. 아이스크림 사 먹을 거야”

  “... 넌 삥을 뜯어도 무슨 백 원을 뜯냐? 쯧쯧” 

  “뭐야, 안 빌려줄 거면 말지 왜 혀를 차냐~ 흥" 

  해성과 지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깔끔한 단발머리에 흰 피부, 쌍꺼풀진 눈을 가진 지현과 해성은 1학년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남자치고 조숙했던 해성에게 지현은 철없는 말괄량이로 보였다. 그렇지만 언제인가부터 해성은 지현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도 동네방네 티를 내면서. 빼빼로데이에 빼빼로를 주고, 화이트데이에 사탕을 주는 건 기본이었다. 지현이 매년 말에 학교에서 열리는 농구대회의 선수들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보고 난 뒤부터는 농구에 매진해서 2학년 때와 3학년 때 주전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해성의 고교 생활은 지현을 좋아하기 전과 좋아하고 난 후로 나뉜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로 했는지 모르겠는 이벤트도 해봤다. 대만 영화에서 풍등을 날리는 장면을 보고 난 뒤 풍등을 날려보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던 지현을 지켜보다가, 해성은 기말고사가 끝난 날 풍등 10개를 사다가 학교 운동장에서 오직 지현만을 위한 풍등 쇼를 해주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풍등을 보면서 천진하게 웃던 지현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수위 아저씨가 걸어오는 걸 보고 둘이 손을 잡고 도망치던 것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2년을 티 내면서 좋아하다가 고백은 수능을 치고 대학에 합격한 뒤, 그때 유행했던 메신저 버디버디를 통해 했다. 

  ‘해성아 난 너랑 친구로 남고 싶오 ㅠㅠ' 

  ‘난 너랑 친구 하고 싶은 마음 없어’

  ‘미안…’ 

  그렇게 해성의 첫 번째 짝사랑이 끝났다. 


4.

  ‘소영아, 너 다음 주 토요일에 뭐해?’

  ‘음… 별 일 없어요. 왜요, 오빠?’ 

  ‘서래마을에 괜찮은 식당이 있던데 같이 갈래?'

  ‘오, 서래마을이면 집에서 가까워요. 좋아요~’ 

  소영은 학교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해성은 한 달 전부터 여러 공연장 홈페이지를 체크하면서 플루트 관련 공연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렸고,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공연을 발견한 뒤 소영에게 바로 연락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걱정해서 일단 밥이나 먹자고 했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공짜 공연 표가 생겼다는 거짓말을 했고, 소영은 조금 당황하다가 같이 공연을 보러 가주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만나다가 해성은 독일로 교환학생을 갔다. 하지만 소영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소영의 동기 보미를 통해 누텔라나 커피 초콜릿을 편지와 함께 소포로 보내기도 했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제는 소영이 이탈리아로 교환학생을 떠난다고 했다. 해성은 오히려 이 시기가 고백을 하기에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만약 소영이 고백을 받아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한 학기를 기다리는 건 해성에게 일도 아니었기에. 만약 소영이 고백을 거절한다 해도, 일단 한 학기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 마주치는 민망한 시기를 피할 수 있다. 또한 기다리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순애보를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고백을 했고, 소영은 머뭇거렸다. 해성은 생각해보고 답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속절없는 3일이 갔다. 소영의 출국일은 다가오고 있었고, 해성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아니면 아니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데 희망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소영에게 대답을 재촉하기는 싫었다. 소영의 출국일 전날,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동네 공원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서 핸드폰을 집에 두고 갔는데, 돌아오니 소영에게 걸려온 부재중 통화 기록이 있었다. 

  “으악!!!!!” 

  해성은 핸드폰을 두고 간 자신을 원망하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소영은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소영은 오후 2시 비행기로 출국할 예정이었고, 해성은 오전 11시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소영은 받지 않았다. 


5.

  해성이 신입생으로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은 ‘새터의 법칙'에 대해 얘기해주곤 했다. 신입생들과 2학년이 주축이 되어 1박 2일 MT 형식으로 가는 새터에서 신입생들은 선배가 주는 술을 마시고 장렬하게 전사한다. 다음 날 쓰린 속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집 방향이 같은 선배가 후배를 자연스럽게 챙기게 되고, 그 둘이 잘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새터 전에 있던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들에게 이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해성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막상 새터 다음날 죽을 거 같이 힘든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살뜰히 챙겨주던 여진을 좋아하게 되면서, 새터의 법칙을 적극적으로 믿게 되었다. 

  여진은 해성보다 한 학번 위 선배로,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수업 시간에 또박또박 발표를 잘하는 걸로 유명했다. 외모는 수수했다. 화장도 잘하지 않고, 옷도 평범하게 입었다. 인기가 많은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해성의 마음에 들었다. 여진은 가을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해성은 살뜰하게 여진을 챙겼다. 미국이라도 한인마트에서 다 구할 수 있는 장조림 캔이나 김, 김치 등을 박스에 챙겨서 보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털모자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사실 고백은 여진이 미국에 가기 전, 여름에 이미 했었고 거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지가 있는 거절이었다. 여진은 해성의 고백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 해성아. 나 좋아해 줘서…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네가 싫은 건 아닌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지금은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왜 지금은 아닐까. 곧 미국에 가서? 해성이 군대에 다녀오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해성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한 학기 먼저 군대에 가기로 했다. 계산에 따르면 해성이 1학년만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하면 여진은 4학년이었다. 애매하게 한 학기를 같이 다니느니, 깔끔하게 군대를 다녀와서 학교를 같이 다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빠른 년생인 해성에게는 입영 통지서도 날아오지 않았지만, 해성은 가장 빨리 입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입대했다. 

  군대에서 남자들과 생활하면서 해성의 마초적인 면이 강화되었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여진에게 한 살 어린 후배나 동생이 아닌 남자로 다가가고 싶었다. 군대에서 나온 첫 휴가에서 해성은 여진과 밥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슬금슬금 말을 놓았다. 

  “누나, 잘 지냈어요? 오늘 좀 덥죠? 그래도 옷은 시원하게 입었네”

  “응, 오늘 날씨 진짜 덥다. 너도 잘 지냈어?” 

  “응, 군대가 다 그렇죠. 남자들밖에 없어서 편한 것도 있어"

   그런 식으로 10분 정도 대화를 나누면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을까. 여진은 머뭇거리다가 해성에게 말했다. 

  “해성아… 그런데 너 나한테 왜 자꾸 반말해?” 

  “아, 누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요…” 

  해성은 순간 쪽팔림을 느꼈다. 그리고 여진에게 자신의 포지션이 어떤 건지도 깨달았다. 지난 고백에서 주었던 여지가 어떤 것이었든, 해성은 여전히 여진에게 후배이고 동생일 뿐이었다. 여진에 대한 마음이 영원할 줄 알고 군대도 남들보다 일찍 갔다. 하지만 해성의 두 번째 짝사랑은 반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끝났다. 


6.

  그렇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까지, 거의 10년을 짝사랑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해성에게 첫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은 대학교 졸업 학기 때였다. 같은 동아리 친구가 시켜준 소개팅에서 만난 같은 학교 다른 과의 미란이었다. 둘은 5개월 정도 만났다. 해성은 처음으로 혼자 좋아하는 게 아닌 서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설렜다. 평범한 연인처럼 진도라는 것도 나가봤다. 하지만 해성이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고, 미란은 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으면서 학교에 남으면서 둘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서로가 첫 연애 상대였기 때문에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할 지혜가 부족했다. 미란은 직장인의 야근 문화나 회사에서 연락하기 힘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해성 역시 미란의 실험실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짧았던 해성의 첫 연애는 끝났다. 


7.

  해성의 두 번째 연인이자 마지막 연인이 된 혜지는 해성과 입사동기였다. 혜지의 첫인상은 도도하고 예쁜 여자였다. 깔끔하게 화장한 얼굴과 정장치마를 입고 펌프스를 신은 혜지의 겉모습은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커리어우먼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혜지는 도도한 여자가 아니라 착한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털털한 성격에 남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미란과 헤어진 이후 해성은 종종 혜지와 퇴근 후에 술 한 잔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알고 보니 혜지도 해성 못지않게 짝사랑을 많이 했던지라 둘은 서로의 짝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사귀기 전부터 통화하면서 밤을 보낼 정도로 친해졌던 혜지는 해성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지금은 해성의 아내가 되어 딸 하나를 키우며 육아휴직 중이다. 


8.

  여전히 내리는 눈을 보면서, 해성은 생각한다. 그 시절 짝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승산 없는 게임을 지속할 수 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모범생 마인드였을까, 아니면 그냥 지고지순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좋아했던 걸까. 

  짝사랑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하지만 보름달도 시간이 지나면 기울듯이, 서로 하는 사랑도 정점을 찍고 나면 불완전해진다.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고, 서로의 아이라는 창조물을 만들고 나면 아예 새로운 관계의 장이 만들어지는 것도 같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녀들을 짝사랑했던 시간은 지금의 해성을 만드는 데 조금씩 일조했다. 그녀들을 짝사랑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평생의 짝인 혜지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성은 가끔 생각한다. 

  그럼에도 문득 궁금해지는 때는 온다. 그때 받지 못했던 소영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소영은 어떤 대답을 해주었을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던 그녀들도 평범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될까. 왜 나는 그때 너에게 닿지 못했던 걸까. 

  세월이 가면 이런 기억도 완전히 희미해지는 날이 올까. 눈 오는 날 노란 우산을 든 여자를 봐도 네 생각이 나지 않는 날이 올까.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기억하고 싶다. 잊지 말고. 




- 인터뷰일 : 2018년 11월 22일

- 인터뷰이의 소설 만족도 : 4.5점/5점

- 소설을 본 인터뷰이의 소감 :

프로그램에 참여한 목적에 부합합니다. 내 이야기를 짧은 미니시리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보고 싶었는데 잘 충족이 되었습니다. 의외로 활자로 된 이야기가 매우 생생한 장면처럼 느껴졌는데 단편적인 기억들의 힘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짧은 글인 만큼 '소설'이 가지는 기승전결이나 주제의식,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허구 창작 부분은 완전한 소설을 기대하시는 참가자라면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나 저한테는 해당되지는 않았습니다. 




글/김명선

- 수원에서 인터뷰서점 '리지블루스' 운영

- lizzyblues0330@gmail.com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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