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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06. 2017

D-84. 독립

철옹성과 그물

1.

나의 기타선생님 Y님과 밥을 먹었다.

평소에도 Y님이 범상치 않은 생각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대화하면서 그런 면모에 대해 두드러지게 느꼈다.

우리는 결혼, 부모님, 인간관계, 게으름 등에 대해 대화했다.

Y님은 어떤 개념에 대한 자신만의 꽤 분명한 정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독립'에 대해 흥미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

Y님이 생각하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다음과 같다.

흠, 정확히 하자면 그녀의 정의를 나의 언어로 해석한 것이다.


- 경제적 독립의 비중은 30% 정도
- 70%는 정서적 독립
- 부모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감정적 영향력을 스스로 다룰 줄 알게 되는 것(특히 부정적인 영향)
-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것


3.

나는 한 때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 = 경제적 독립'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는 학교 기숙사에 살면서 내 돈으로 기숙사비와 용돈을 해결하면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학교 2학년 때인가, 계절학기를 안 들으면서도 여름방학 때 기숙사에 머물고자 했다.

굳이 수업을 듣지 않더라도 원래 집인 수원에 있는 것보다 서울에 있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반대하셨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기숙사비를 부담하겠다고 했다.

아빠는 "네가 돈을 낸다고 네 맘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와 관련해 어느 정도 싸움이 있었다.

지금은 정황이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여전히 다시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우리 부모님은 내가 돈을 낸다고 내 맘대로 결정하게 두실 분들은 아니구나-라고.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지원을 하시든 안하든, 부모님에겐 나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권리가 있다고.


나도 지금은 받아들인 편이다.

사실 저 기숙사 문제의 핵심은 돈 내는 주체가 아닌 소통의 방식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걸 싫어했던 것이었다.


이걸 나는 대학교 4학년 때쯤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그리고는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는 부모님께 미리 상의를 가장한 통보를 한다.

최근에 있었던 '함 & 예물' 관련 일처럼 부모님이 고집을 안 꺾으시는 경우도 있지만.


4.

정서적 독립에 대해 위와 같이 생각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정서적 독립 =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음' 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초딩 때부터 어느 정도 이뤄졌던 일이다.


그런데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감정적 영향을 잘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라니.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아직도 제대로 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아빠로부터.


5.

작년에 또 아빠랑 대판 싸운 적이 있다.

아빠는 화를 냈고, 나는 대들었다.

난 내가 혼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고, 억울한 감정은 커지고 커져서 주체할 수 없는 미움과 분노가 되었다.

그리고 이 미움과 분노는 '해외로 가출'이라는 극단적 상황까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데까지 이르렀다.


남자친구의 다독임이 없었으면 정말로 실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해외로 가출'이라는 극단적 행동은 포기했지만, 나는 마음 속에 아빠를 향한 철옹성을 쌓았다.

아빠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었고, 그 어떤 감정적 교류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요즘은 시간이 지나고 별일이 없어 철옹성이 많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골격은 남겨두었다. 언제 다시 쌓아야 할지 모르니까.


6.

오늘 생각해보니, 난 아빠로부터 감정적 독립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정의에 따른 감정적 독립은 그물같은 이미지를 준다.

무엇이든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철옹성이 아니라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을 지켜주는 그물.


아빠의 분노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또 작년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약 제대로 독립한다면,

아빠의 분노를 받아들이고, 이를 충분히 내부에서 자정해서 불필요한 감정은 밖으로 배출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 상처를 털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이다.


진짜 독립은 그런 것일 것 같다.

아무런 영향도 안 받는 게 아니라, 영향은 받되 그럼에도 내 중심은 지킬 수 있는 것.


7.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봤던 진짜 막장 부모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모든 가족이 꼭 서로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연을 끊는 게 훨씬 이로운 가족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내 이야기는 좀 애매한 가족을 둔 분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디가서 대놓고 욕하기는 그렇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8.

나는 좀 더 완성된 독립, 철옹성이 아닌 그물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는 오늘도 계속.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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