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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21. 2017

D-70. 사랑에 대하여

사랑에 대한 문장 그리고 사람들

1.

3일 전에 <결핍이 사랑을 부른다>는 글을 쓰고 나서, 페이스북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디자인 경영 학회(라고 정의하기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대체할 표현도 애매한) 디마 스튜디오의 후배 K양이 보낸 메시지였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백일의 백수 매거진을 재밌게 잘 보고 있음

- 본인을 포함한 6명이 매주 키워드와 편집된 텍스트(문학 속 짧은 문장들의 모음들)을 읽고 그 글에 대한 관점을 나누고 그 관점을 바탕으로 짧은 글을 쓰는 모임을 가지고 있음

- 이번주 주제가 '사랑'인데 게스트로 모임에 참여해주면 감사하겠음


2.

이런 메시지를 받고 처음 느낀 감정은 '우와, 신기하다!'였다.

서로 일면식 정도 있는 사이에서 이런 접촉을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용기가 대단해보였고, 내가 뭐라고 초대까지 한다는 거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정확히 어떤 모임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가 보고 싶다니, 그리고 때마침 시간도 되길래 '가겠소!!!'를 외치고, 오늘 정말 다녀왔다.


다행히 모임은 꽤 흥미로운 대화들이 오가는 자리였다.


3.

원래 멤버는 6명인데, 한 명이 사정으로 불참해 나름 포함해 다시 6명이 되었다.

남자 셋, 여자 셋으로 성비가 균형적이었고, 나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누군가 화두를 던지고, 거기서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또 다른 화제가 나오고, 또 거기서 발전되고, 넘어가고. 그런 식이었다.

멤버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했고, 이렇게 자신의 관점을 좀 더 뾰족하게 하기 위한 모임에 귀중한 일요일 시간을 낼만큼,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타인의 견해를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로 보였다.


4.

처음에는 저번 주 주제였던 '오만'에 대해 멤버들이 써온 글에 대한 생각 공유로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후에 오늘의 주제인 '사랑'으로 넘어갔다.


처음 나온 화두는 사랑은 운명이냐 vs 우연이냐-에 대한 문장이었다.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모든 사람 관계는 참 많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굳이 당신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걸 운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굳이 당신만이 내 짝이 될 가능성이 있었을까?

한 끗발만 차이나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당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의견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게 두렵다는 사람도 있었다.


결혼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결혼하고도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엄청난 부를 가져 청담동 마녀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남편의 바람끼는 어찌할 수 없는 박민숙이라는 캐릭터가 이런 식의 말을 했다. 이혼 서류에 도장까지 찍은 후였다.

언제나 이혼 서류를 가슴에 품고 살아. 우린 언제나 잠재적 이혼 가능 상태야.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람의 마음까지 잡아주지는 않는다.


5.

선별된 문장들을 읽으며 내가 제시했던 화두와 연관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이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지난 글에서 썼던 나의 사랑(우울증 때문에 남자친구가 필요하고, 그래서 그를 사랑한다)이 미성숙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 문장 자체를 공격하고 싶었다. 내 사랑이 미성숙하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으니까.

다른 멤버들도 여러가지 이견을 제시했다.

사랑을 성숙한 사랑/미성숙한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냐-는 의견부터, 상대를 배려하고 주는(Give) 사랑이 성숙한 사랑이다-라고 생각한다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내 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면서 정리된 내 관점은 다음과 같다.


나의 현재 사랑은 미성숙하다.

내가 사랑하는 성숙한 사랑은 지속 가능한 사랑이다.

한 여름밤의 꿈같은, 열병같은 사랑이 아니라 평생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신기루같은 언약을 어떻게든 지켜보려는 사랑이다.

그런데 내 사랑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내 우울증이 사라진다 해도 나는 지금처럼 남친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그를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반대로 남자친구의 사랑은 성숙하다.

그에게 나는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게 때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날 필요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남자친구의 성숙한 사랑이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나의 미성숙한 사랑도 점차 성숙해지길 바란다.


결핍은 사랑을 부르지만,

결핍만이 사랑의 이유라면 그 사랑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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