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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27. 2017

D-64. 독

너무 큰 독이 생기기 전에 멈추는 것도 괜찮아

1.

몸이 으슬으슬

코가 간질간질

목이 시큼텁텁

한게 감기에 걸릴 것 같다.


라오스에서 중간중간 실내 에어컨이 너무 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영향과 함께 어제 평소처럼 문을 열고 얇은 이불만 덮고 잔게 화근이 되었나 보다.

처서도 지나고, 하늘도 맑고, 바람도 차고.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진다.


2.

여독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여독이라는 단어도 아냐며 칭찬해줬던 게 생각이 나기 때문이라는, 몹시도 유치하고 자아도취적인 이유다.


어딜 다녀오든 여독은 조금씩 남는다.

장시간 이동거리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여행 중에는 일상 생활보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그 여운이 여행 후 몰려오는 것 같다.

라오스에서 피곤해도 잠이 잘 안오고, 푹 못잤는데

돌아오는 비행기부터 엄청 자기 시작했다.

금요일날 낮잠을 실컷 잤는데도 밤에 또 잠이 오고,

어제도 서울에 다녀오니 또 피곤해져서 글도 못쓰고 잠이 들어버렸다.


3.

여행뿐만 아니라, 많은 경험이 일종의 독을 남기는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하다.

큰 일을 치를 때는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스트레스가 생기니까.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빨리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야 - 때로는 그 경험의 시간만큼 - 사라지는 종류도 있는 듯하다.


4.

기억에 남는 독을 남겼던 일로는 첫 남자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두 번째 회사에서의 퇴사가 있다.

벌써 6년이나 지난 구남친과의 이별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고작 1년밖에 안된, 퇴사 후 후폭풍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를 탓하고, 남을 탓하고.


육체적 독은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면 자연스럽게 빠지지만

정신적 독은 되새김질을 하면서 지나간 일을 정리해야 한다.

직면하는 고통이 만만치 않아서 잘 되지는 않지만.


5.

어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독보적으로 인상깊은 말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 10이라면, 4-5에서 멈춰도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극단까지 견디다가 겨우 멈추는 것 같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멋진 말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나를 던져버리는 건 후회는 안 남길 수도 있지만, 무시무시한 독을 남길 수도 있다.


나는 그만큼 강하지 않고,

무시무시한 독을 빼내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이제는 적당한 때에 멈추는 것을 연습하려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는 건 불가능하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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