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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27. 2017

D-63. 내가 결혼하는 진짜 이유

1.

오랫동안 재밌게 봤던 '아버지가 이상해'가 끝났다.

백수가 되고 나서 주말에 더 바쁘다 보니까 기사만 챙겨보면서 스토리를 따라갔는데,

본방은 사수해서 다행이다.


주말드라마 특유의 특징(가족제일주의, 훈내 폴폴 등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주조연들이 연기를 잘하고, 무엇보다 이유리가 연기한 변혜영(후에는 이혜영) 캐릭터가 참 멋져서 흥미롭게 봤다.

오늘도 변혜영은 명대사를 던졌다.

차정환(류수영 분)과의 결혼인턴제(결혼은 했으나 인턴처럼 일종의 계약제로 시험삼아 살아보는 것) 종료를 앞두고 이후의 삶을 논의하는 장면.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나는 그동안 내가 '결혼'을 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더라고.
나는 '차정환'이랑 결혼을 한거더라고.


2.

8월 초부터 열심히 청첩모임을 진행중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자면 최대한 아는 사람끼리 묶어서 진행하는 게 좋겠지만, 그럼 그냥 회식같은 분위기가 되는 게 싫어서,

그리고 나는 요즘 시간부자니까

가능한 쪼개서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결혼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근황이나 최근 관심사를 신나게 공유하다 헤어지고는 한다.

섭섭하기보다는 재밌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좀 일찍 결혼하는 편이다보니, 자신과 결혼은 먼 얘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얘기를 하다보면 자신의 결혼관 등을 말하고, 그러다 보면 나도 내가 결혼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여러 번 얘기하다보니 어느 순간 정리가 되었다.

오늘도 난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다.


어떻게 보면 난 '결혼'을 이용하고 있어.
부모님한테 독립하고 싶고, 그렇다고 혼자 살기는 싫어.
우리 부모님은 동거를 절대 허락하실 분은 아니야.
나한테 결혼은 어떻게 보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가장 쉬운 선택이었어.


3.

드라마를 보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글은 써야지-하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공부하려고 하면 꼭 책상을 청소하고 싶은 것처럼, 글쓸 때도 비슷하다.

오늘은 특히 책상 위에 있는 하얀색 오디오에 앉은 먼지가 거슬렸다.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하나둘 치우면서 물티슈로 먼지를 닦는데, 문득 위에 있던 물건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였다.

PEACE BEGINS WITH A SMILE!
- MOTHER THERESA-

라고 쓰여진.


이 액자는 사실 편지다.

사귄지 일주일만에 남자친구한테 받았던.

우리가 처음으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러 갔던 서촌에서.

손글씨를 나만큼이나 못쓰는 남자친구가 삐뚤빼뚤 써서 주었던 깜짝 선물.


(...)
니가 힘든 시기가 오면 보고 힘내라고, 한번이라도 더 웃으라고 골라봤어.
나는 아직 너의 그런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런 시기가 와도 난 한결같이 니 옆에 있을게.
그때가 되면 니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도 눈치 없는 척하고 계속 불러내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꺼야.
그러니깐 너도 너무너무 귀찮고 싫어도 10번에 한번은 따라와야 해.
(...)


이 편지에서 말하는 '너의 그런 모습'은 우울증을 겪는 나다.

사귈 때부터 경고했으니까.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라고.


아마 이 편지를 받고 일주일 후에 우울증이 도졌는데,

실제로 내 옆에 있어줬다.


4.

결혼을 준비하다 보니 워낙 이것저것 할 게 많아서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얻는 게 뭐지?

잃는 건 뭐지?


또다른 며느라기가 될까봐 걱정하고.

하고 싶은게 생겨도 못할까봐 걱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는 건 부모님으로부터의 쉬운 독립이라는 '결혼이용론'을 정리해서 말하고 다니고.


5.

그런데 문득 변혜영의 대사를 떠올려본다.

남자친구의 사랑이 가득 담긴 첫 편지를 열어본다.


더 이상 내일 출근하더라도 새벽 4시까지 통화하던 열정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같이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재밌고 잘 통하는 사람.


내가 결혼하는 진짜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이 사람이어서 할 뿐.



<끝>



글/ 김명선

- 수원에서 심리상담서점 <리지블루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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