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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Sep 11. 2017

D-48. 재밌는 책

한수희, <온전히 나답게>

1.

나다움을 추구하지만, 남이 써놓은 나다움에 대한 글을 읽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혹하기보다는 거부감이 들었다.

흔한 자기계발서처럼 '다른 사람 시선 신경쓰지 말고 너만의 길을 가라'같은 시덥잖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은 아닐까.

부제로 붙은 '인생은 느슨하게, 매일은 성실하게'를 보면서는 '흠, 이건 이동진 평론가가 했던 말인데'같은 비판적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만난 곳이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이 재밌는 책을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3단짜리 서가의 중반부에 그래도 표지를 내보이고 있는(주인장이 추천하는 책이라는 뜻인듯) 책이었고, 맨 앞에는 주인장이 읽었던 책이 밑줄과 플래그가 덕지덕지 붙어 샘플처럼 있었다.

그 책을 둘러보다가 아래 문장을 보고 구매를 결정했다.

이미 집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4권의 책이 있었고, 그 중 한권은 이미 가방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됐든 책을 사는 것은 투자 대비 효용 가치가 가장 높은 일에 가깝다. 어떤 사람의 전 생애를, 사상을, 사고를, 지식을, 감성을, 영혼을 단돈 몇 만원에 살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돈 아까운 일이 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전혀 건질 것이 없는 책도 많다(내 책도 그런 데 속할 수도 있다).
- 142페이지


솔직히 말하면 난 책 소유욕이 별로 없고,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보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려본다는 옵션과 비교해 굳이 책을 사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구매하는 것이 "투자 대비 효용 가치가 가장 높은 일"이라는 말에는 매우 동의한다.


2.

이 책은 재밌고 쉽게 읽힌다.

이 재밌고 쉬운 책을 쓰기 위해 작가는 재미없는 인고의 시간을 많이 보내야 했겠지만.


빈 페트병을 잘라서 컵 수납 용기로 쓰고, 우유갑을 씻어 말려서 서랍 안에 넣어 속옷이나 양말 같은 것을 수납할 수 있다고도 한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방법은 가뜩이나 더러운 서랍 안에 페트병과 우유갑 쓰레기까지 쑤셔 넣는 짓이다.
- 223페이지

두 번째 문장을 읽고 현웃(현실 웃음)터졌다. 왜 웃긴지 설명은 안된다. 이런 문장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런 책을 쓸 정도면 보통의 감수성과 문장력을 가진 분이 아닌 것이 분명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은 몹시도 평범하고, 게으르고, 현실적인 면들이 많다.


이 책은 공감이 많이 된다.

책 뒷표지에 '거침없이 솔직하고 너무나 현실적인 공감 에세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 역시 너무나 마케팅적인 메시지이지만 다 읽고 봤을 때는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껏 여행을 떠나 정말로 필요한 데 없어서 쩔쩔맸던 물건이 있다면, 그건 바로 머리끈이었다. 나는 그놈의 머리 묶을 고무줄이 없어서 도미니카공화국의 리조트에서 내내 괴로워했던 것이다. 매일 떨어진 머리끈이 없나 바닥만 쳐다보고 다녔고, 리조트의 기념품 가게에서 만 원에 육박하는 머리끈 가격을 보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기도 했다.
- 239페이지


이건 정말 묶어야 되는 기장의 머리칼을 소유했고, 머리를 묶었을 때의 상쾌함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매우매우 공감할 문장이다. 나의 경우는 더운 여름, 대학교 1학년 시절 학교에서 고무줄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떤 일까지 했냐면, 과방에 있었던 과깃발에 달려있는 노란 술을 잘라서 머리고무줄로 쓰려다가 실패하기까지 했다.


3.

오늘은 힘든 하루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에너지밖에 없어서 힘들었다.


자고, 자고, 또 잤다.

너무 많이 자면 괴로운 꿈도 꾸고, 머리도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쌓여있던 내 몸의 독소가 빠져나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힘든 하루의 끝자락에서,

내가 너무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뭔가 이 책의 매력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해서 아쉬움은 남지만 말이다.


13,500원으로 이렇게 재밌는 영혼을 가진 작가의 책을 만나는 건,

분명 효용감 만빵의 일이었다.


*이 책의 모든 인용구는 <온전히 나답게>(한수희, 인디고 출판)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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