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저만치 혼자서'
김훈이 16년 만에 낸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의 표제작은 충남 바닷가 호스피스 수도원의 나이 든 수녀들과 이들을 보살피는 신부들을 그렸다. 김루시아 수녀는 똥오줌 지리는 게 민망해 노구를 이끌고 직접 빨래한다. 젊은 장분도 신부가 걱정하자, 김요한 주교는 이렇게 답한다. “김루시아 수녀님의 빨래를 수거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의 예절이며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 우리는 원로 수녀님의 결벽과 수줍음을 존중해야 합니다.”
김훈이 항상 그랬듯이, 이 소설집에 담긴 7편의 단편 역시 개념, 이념으로 표상되곤 하는 세상을 구체적 인간의 모습으로 안착시키려는 시도다. 개별 인간들의 세상에는 지린내, 비린내, 쉰내가 넘친다. 코 막고 고개 돌릴 일이 아니라, 그런 것이 인간 세상이다.
예를 들어 ‘명태와 고래’는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펴낸 방대한 종합보고서를 읽은 뒤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쓴 글”이다. 소설에는 물길에 밀려 원치 않게 북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간첩 취급받고 삶이 망가진 어부가 나온다. 보고서의 사실들이 “이춘개는 출감해서 향일포에 온 지 두 달 뒤에 죽었다. 선착장에 묶인 배와 배 사이의 물에 빠져 죽었다”와 같은, 감정을 눌렀지만 어쩔 수 없이 새 나오는 문장으로 정리됐다.
작가는 소설집 말미 ‘군말’이라며 각 단편의 창작 배경을 밝혔다. “소설책의 뒷자리에 이런 글을 써 붙이는 일은 객쩍다”고 털어놓지만, 독자에겐 삶에서 얻어낸 작은 아이디어와 생각들에 어떻게 살이 붙는지 짐작하는 단서가 된다.
김훈의 신간에 대해 저렇게 썼다. 몇 마디만 덧붙이고자 한다. 이 소설집에 담긴 단편들에서는 대부분 사람이 죽는다. 아주 오래전 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도 있고, 현대의 강간 피해자였다가 자살한 사람도 있다. 죽지는 않더라도 나이가 많아 죽음의 기색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장편들에서도 죽음은 도처에 있었지만, 작가 나이가 70대 중반이라 역사 속 죽음이 아니라 주변의 죽음을 더 가깝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이 죽음들은 비장하거나 사회적 파장을 낳지 않아, 울적하다. 억눌렀지만 슬픔이 도처에 깔렸다. 김훈은 여전히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신선하기보다는 익숙하게 느껴진다. 아마 김훈의 소설들을 읽어온 많은 독자들이 그러할 것이다. 여전히 아슬아슬한 대목들도 있다. 강간 가해자의 어머니 시선에서 전개되는 '손'이나,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성 시선에서 전개되는 '영자' 등이다. '손'이 강간 피해자를 폄하하거나 강간 가해자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가해자 서사'로 읽히는 대목이 있다. 미디어는 가해자 서사를 지양하는 분위기다. 소설도 그러란 법은 없다. 천하의 악당이라도 그 성장과정과 내면을 악마화해 아예 들여다보지도 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소설에선 강간 가해자가 그런 범행을 저지르는 쪽으로 이끌려간 상황을 묘사한다. 이런 서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영자'는 고시텔에 그나마 번듯한 거주공간을 가진 젊은 남자가 관리비를 내주며 동거할 여자를 찾아 함께 살 섞고 시험 공부하다가 남자는 합격해서 떠나고 여자는 또 다른 어딘가로 가는 이야기다. 남자는 시골의 공무원이 돼 이런저런 잡일을 하다가 가끔 여자를 생각한다. 동거는 양측이 동의했으니 '합리적인 계약'이라 하면 그만이지만, 역시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