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전 2권, 황금가지)는 액션, 스릴러 영화에서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섞어놓았다. 마지막 한 탕을 하고 은퇴하려는 범죄자 이야기와 옆집 소녀를 구하는 은퇴한 킬러 이야기. 물론 '마지막 한 탕'은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아 주인공은 큰 곤경에 처하거나 심지어 죽을 때도 있다. 옆집 소녀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은퇴한 킬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왠지 모를 의협심을 발휘해 옆집 소녀를 구한 뒤 스스로를 희생하곤 한다.
'빌리 서머스'는 전자의 소재로 시작한다. 해병대 출신 저격수이며 전쟁의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은 법원에 출두하는 한 범죄자를 제거하는 일을 맡는다. 평소 다른 일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이 걸려있어서 의심스럽긴 하지만, 마지막 일이기에 수락한다. 물론 이 장르의 익숙한 흐름대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타깃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도주 과정에 문제가 생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옆집 소녀'를 구한다. 실제 '옆집 소녀'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인물 설정이다. '옆집 소녀' 이야기는 책 중반부부터 나온다. '옆집 소녀'는 추후 주인공의 일에서 모종의 역할도 한다.
여기에 주인공 빌리 서머스가 작가 지망생이라는 설정도 살짝 추가했다. 일자무식 킬러 행세를 하지만 빌리는 에밀 졸라 등을 즐겨 읽는 독서가였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장기간 대기하는 동안 빌리는 작가로 위장해 사무실을 임대하는데, 이 과정에서 빌리는 실제로 자신의 삶을 픽션화해 집필한다. 소설 속 소설 형식으로 빌리가 과거 겪었던 일들이 드러난다.
처음엔 이 설정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 설정은 빌리의 과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 정도로만 기능한다. 스티븐 킹에게 소설 속 소설을 통한 메타 세계 창출 같은 야심은 없었던 것 같다. 빌리의 소설은 이탤릭체로 쓴 회상 역할 정도만 수행한다.
중반부에 스티븐 킹 답지 않게 전개가 느리다 생각했는데, 다 읽고 보니 두 가지 이야기를 결합하기 위한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따로 보면 흔하디 흔한 이야기지만, 역시 탁월한 장르 소설가인 스티븐 킹은 어찌 됐건 독자를 끝까지 붙들어두는 소설을 써냈다. 심지어 스티븐 킹답지 않게 상당히 낭만적인 장면들도 이어진다. 물론 중년 남성 입장에서 낭만이지, 그 상대인 젊은 여성 나이대의 독자에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