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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랩 Oct 18. 2022

내가 즉흥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파워 ‘p’ 형 인간의 승무원 생활


요즘 mbti는 거의 신분증, 마패 정도의 위용을 자랑하는 것 같다.

특히나 내 직업(승무원)처럼 새로운 사람과 그날의 합을 맞춰 일을 해야 하는 경우, 어느 정도 바쁜 시간이 지나간 후 말을 트기 좋은 화제는 단연 'mbti'이다.


나의 mbti는 학창 시절부터 줄곧 'infp'였는데, 최근에는 대면 서비스를 생업으로 해서인지 'enfp'로 바뀌었다. 바뀌었어도  i와 e의 비율이 근소한 차이이다.(49와 51 정도!)


결국 내향과 외향의 경계에 있는 나의 성격은 0nfp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특히나 '감성'을 나타내는 f가 거의 90%에 가깝고, 인식형이라고 불리는 p의 성향도 80% 이상이다.



p : perceiving


"자유분방하고 유연하며 즉흥적인 성향으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 그렇다. 그게 바로 나이다.


j의 성향을 갖고 있는 내 남편을 보면 통제 밖을 벗어나거나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계획을 꼼꼼히 세운다기보다 어느 정도 예상 범위 안에 있는 것들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스타일.


반면에 나는 상황이 예측 불가하게 변경되어도 잠시 당황할 뿐 그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다가간다. 이렇게 설명하니 꽤나 쿨하고 멋진 사람 같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미련'이 없다. 애초에 어떤 것을 꼭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함께 사는 내 남편은 이렇게 나와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나와 자주 보는 친구들의 성향을 살펴보면 p의 성향이 강하다.

특히나 승무원 친구들.


우리의 만남은 늘 즉흥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스케줄'이 늘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대기 스케줄'이 한 달 달력에 지뢰처럼 네다섯 개씩 포진되어 있고, 원래 정해져 있던 스케줄도 '대기 스케줄'이 어디가 나오느냐에 따라 다 변경될 수 있다.


예를 들어, 3일에 '대기 스케줄' (스케줄 표에 빈칸으로 표시되며 rf라고 부른다 [ready to flight])이 있고 원래의 스케줄이 4, 5, 6, 7 3박 4일 장거리 스케줄 그리고 8,9일이 쉬는 오프 날이었다고 쳐보자.


8, 9 일이 쉬는 날이니까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랑 보기로 8일에 약속을 잡아두면!?

3일에 갑작스럽게 불린 2박 3일 중거리 스케줄로 그 뒤의 스케줄이 다 빈칸으로 변해버려, 8일 당일 쉬는 날이었던 것이 근무 날로 바뀔 수 있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친한 친구의 경조사도 "오 그날 쉬어! 갈게!!" 해놓고 "미안, 스케줄이 바뀌어서 못 가게 됐어. 너무 미안해. "라고 사과하며 가지 못하게 될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승무원 친구들과 잡는 약속은 뜬구름 같을 때가 많다.

정해진 것, 계획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그런 신기루 같은 약속.


그래도 서로가 각자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크게 불평불만이 없고 대부분의 약속이 하루 전에 정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야, 너 스케줄 나왔어? 어떻게 됐어?"

"나 오프 떴어!!"

"오 다행이다. 그럼 내일 볼까?"


저녁 대 여섯 시쯤 다음날 스케줄이 '휴무'로 나오면, 저번에 약속을 못 지킨 친구부터 내가 가고 싶었던 카페나 전시회를 좋아할 만한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을 돌리기 시작한다.


"아, 내일 약속 있구나."

"아 지금 미국이야? 아니 나 내일 오프 나와서 너 혹시 되나 하고"


서너 명에게 물어봐서 시간이 맞는 친구와 잠깐 만나거나, 시간 맞는 친구들이 없으면 가보고 싶던 전시회를 혼자 찾아가거나 카페를 구경 가거나 한다.

갑자기 얻게 된 휴무라서 인지 즉흥적으로 하는 모든 일이 즐겁고 선물 같아서 난 참 좋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이고 즉흥적인 나에게도 이런 상황이 늘 행복한 건 아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이나 뮤지컬 같은 '선예매'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늘 큰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분 한 달 전에 티켓팅이 필요한데 나는 당장 내일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티켓팅부터가 불가능하고, 만약 운이 좋게 공연 일이 쉬는 날이더라도 이미 매진되어서 못 가거나 남은 자리를 겨우 예매해서 가야 하기 때문에 '좋은 자리'라는 건 있을 수 없다.


친한 친구의 결혼식, 갑작스러운 부고를 듣고 찾아가야 할 장례식, 5명 이상이 계획해 떠나는 단체 여행.

남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이렇게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서일까, 애초에 난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내 정체성을 만들어버린 걸까.


그전에는 더 크게 속상하고 사무치던 것들이 이제는 꽤 당연해졌다.

그리고 적응돼갔다.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내가 내 삶을 더 'p형 인간'에 가깝게 설정해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젯밤 5시에 통보받은 '휴무'가 시작됐다.

'휴무'를 나타내는 'DO'라는 코드를 보자마자 신이 나서 그전부터 봐 두었던 '퍼스널 컬러' 진단 수업을 등록했다.


"무료 결제 취소가 불가능한 날짜입니다"

나에겐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문장.

큰맘 먹고 예매한 것들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취소 수수료만 지불한 채 사라진 경험도 너무 많다.

그래서, '당일 예약' '워크인'에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나름 만족하는 'p형 인간'의 삶이지만, 적어도 계획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는 것' '지금 가능한 것' 안에서 내 취향을 찾아가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취소 수수료'가 조금 아까워도 '꼭 하고 싶은 것'은 미리 예약해서 해 보는 삶을 살아가 보자는 게 내 작은 바람이다.

그것만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취향'을 타협하는 것 말이다.



계획할 수 없는 즉흥형 인간의 아주 소소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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