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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을 바라보는 관점 Sep 06. 2024

나는 아주 멋진 기억장치를 가지고 있다.

80년대 학교 생활...


“쫘~악~~~” 나는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이 없다. 

마녀가 나의 뺨을 때렸으나 난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9살. 그때의 내 나이다. 물론 이 나이는 현재 챙기는 만 나이가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 

난 9살 때 학교의 마녀에게서 수업 시간에 뒤를 돌아보았다는 이유로 뺨을 맞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수업 시간에 나를 불렀다. 뭐 때문에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담임인 마녀는 자신의 수업 시간에 반듯이 앉아 앞을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만약 다른 행동을 하면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녀가 칠판에 글을 다 쓰고 뒤돌아 본 바로 그 시점에 내가 자신에게 뒤통수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맨 앞줄에 앉은 내가 마녀가 칠판에 받아 적으라고 쓰고 있는 내용은 보지 않고 뒤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녀는 그 순간 나를 교단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뺨을 때렸다. 다행히 난 책상에서 나와 마녀 앞으로 나갔던 기억까지만 있다. 마녀가 나를 때린 기억이 전혀 없다. 나의 멋진 기억장치는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을 나에게 남겨 놓지 않았다. 정말 난 멋진 기억장치를 가진 것이다. 그날 앞으로 불려 나간 후 기억이 내 머릿속엔 없다. 


사진 Unsplash의Austrian National Library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알았다. 그때 내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등학교 동창 중에 그 당시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알려 줬다. 

‘초등학교 때 우리 반의 한 아이가 담임한테 따귀를 맞았는데 울지 않았었다’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난 한동네에 살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그 동네에서 다녔다. 초등학교 옆에 중학교가 있었고 그 중학교와 같은 이름의 고등학교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 난 굉장히 소심했고 친구도 못 사귀는 아이였다. 키도 작고 꼬질꼬질했다. 


기억에 잘 씻지도 않았다.(사실 가끔씩 엄마가 씻겨 줄 때마다 때를 민다고 너무 박박 밀어서 씻을 때 도망 다녔던 기억이 난다.) 옷도 할머니가 입혀주시는 대로 그냥 입고 다녔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뽑은 불우이웃 돕기 대상자였다. 겉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기에 불우이웃 대상으로 뽑힌 거 같다. 불우이웃이라고 학교에서 준 라면 한 박스와 잠바 입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옷과 라면 한 박스를 받아 가져갔을 때 저녁에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말했다. 

‘학교에서 이런 것도 주니? 학교 너무 좋구나’라고. 그러시면서 무지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신발주머니로 아이들이 내 책가방을 때릴 때가 있었다. 난 왜 그러는지 몰랐다. 그냥 속으로 ‘저 애는 왜 나를 치고 가는 거야?’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집에 가서 보면 책가방 안에 있던 필통 없이 넣어 놓은 연필이 부러져 있던 경우가 자주 있었을 뿐이다. 


사진 Unsplash의Museums Victoria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에선 말도 거의 한마디도 안 하는 아이였다. 특히 3학년 때까지 심했다. 

3학년 1학기 때 성적순으로 반장 후보가 되어 앞으로 나간 일이 있다. 80년대는 지금처럼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반장을 뽑지 않았다. 성적순으로 그냥 후보가 되었다. 마녀가 무서워서 난 수업 시간에 열심히 집중에서 들었고 그게 그냥 내게 잘 기억되어 있었던 거 같다. 암튼, 앞에 나간 자체가 나에겐 공포였고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울다가 내려왔다. 


다행히 학년에 올라가면서 나는 변했다. 

변하기 전까지는 앞뒤 혹은 옆에 앉은 아이와 1년에 한마디나 할까 말까 할 정도로 말을 안 하던 아이였다. 

그런 내가 마녀에게 2번 따귀를 맞았던 거 같다. 더 맞았을 수도 있으나 나의 멋진 기억장치로 인해 다른 기억은 더욱 없다. 불려 나갔던 그때도 행복하게 불려 나간 이후 기억이 없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번은 시험지에 이름을 안 써서였다. 


난 마녀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시험지는 100점이었고 지금 나오면 마녀는 용서해 준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마녀의 목소리는 점점 화가 난 게 느껴졌다. 

‘지금 나오면 선생님이 용서해 준다. 하지만 선생님이 이 시험지를 가지고 이름을 다 불러서 걸리면 선생님은 용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나의 이름을 썼다고 확신했기에 나가지 않았다. 마녀는 시험지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출하며 불렀다. 결국 이름을 안 쓴 건 나였다. 그 시험지를 보았을 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은 했다. 

‘와~ 누군지 나처럼 예쁘게 색연필로 해놨네’

‘나랑 비슷하게 해 놓은 친구가 있나 보다’

난 철석같이 이렇게 믿었다. 

'난 분명히 이름을 썼어'

근데 이름을 안 쓴 아이는 나뿐이었다. 


마녀 입장에선 60명이 되는 아이들의 시험지를 하나하나 불렀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난 충분히 마녀의 입장이 이해 간다. 

결국 난 또 앞으로 불려 나갔고 ’철썩~~‘ 따귀를 맞았다. 이 역시 앞으로 나간 거까지만 기억이 난다. 나의 멋진 기억장치는 또 지워버린 것이다. 내 기억에 없으니 내가 겪은 게 아닌 것이다. 이때 역시 기억이 없으니 울지 않았다. 


고등학교 친구 말로는 맞고 말똥말똥 마녀를 쳐다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마녀는 더 화가 났을 수도 있다. 아니 사람이니까 화가 났을 것이다. 이해한다. 

이 마녀가 나의 따귀를 때렸다고 마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마녀의 당시 마음이 난 이해 간다. 얼마나 화가 났었을까? 그러니까 9살짜리 아이를 불러서 따귀를 때렸겠지. 


난 사실 이 마녀를 싫어한다. 하지만 나를 때려서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마녀가 너무 싫은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이 마녀는 정말 정말 뚱땡이고 못생긴 아이를 칭찬하고 엎어 주고 했다. 

그 뚱땡이고 못생긴 아이는 공부를 잘한 거 같지 않다. 근데 엄청 잘 사는 집 딸이라고 했다. 마녀는 그 뚱땡이를 엄청 자주 불러서 칭찬하고 안아 줬다. 정말 사랑하는 거 같았다. 


물론 내가 이 마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받고 싶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나의 모습을 보면 사랑스러운 9살은 아니니까. 코를 찔찔 흘리고, 옷은 오빠나 언니가 입고 물려준 걸로 소매 끝이 너덜너덜했다. 얼굴도 잘 씻지 않아서 꼬질꼬질 때가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 누가 이쁘다고 하겠는가?

난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 어린 마음에 이 마녀가 싫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어쩔 수 없던 걸로 차별 대우를 받은 느낌이 있어서 그랬던 거 같다. 그땐 내가 깔끔하게 꾸미며 다닐 줄도 몰랐고 매일 깨끗이 씻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새 옷을 사서 입혀준 사람도 없었다. 물론 나의 부모는 촌지라는 걸 들고 학교에 오지도 않았다. 바빠서 학교에 올 수 있는 형편도 안되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부모의 형편이 좋은 아이와 아닌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특히 80년대는 더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진 Unsplash의CDC


그 뚱땡이와 발레를 하던 다른 아이, 이 둘을 마녀는 특히 좋아했다. 당시 발레를 하던 아이는 진짜 집이 잘살았던 같다. 부모님이 진짜 부자인 거 같았다. 이쁜 옷에 얼굴도 이국적이며 하얬다. 가끔씩 학교에 와서 자기가 배운 발레를 보여줬다. 

뚱땡이와 발레 했던 아이 부모는 학교에도 정말 자주 왔던 거 같다. 그럴 땐 우리 반 모두 맛있는 걸 먹었고 행복했다. 


난 마녀에게 관심 자체를 받기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녀에게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였나 보다. 


나는 나의 멋진 기억장치가 좋다. 일부 기억은 나에게서 지워 주었으니까. 정말 그 부분을 기억장치가 지워 주지 않았다면 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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