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업을 앞두고 동영상 재생을 체크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은 끙끙대는 나를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그 노트북 좀 오래되지 않았어? 바꿀 때가 된 것 같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동안 포맷이 필요한 낡은 노트북을 붙들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니.
“이참에 새로 사자. 간단한 작업만 할 거니까 비싸고 좋은 건 필요 없을 것 같아.”
예상치 못한 지출에 당황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음 날 새 노트북이 배송됐고, 남편은 필요한 프로그램을 설치한 뒤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수업 전 날, 나는 원고를 정독하며 필요한 부분은 암기도 해가면서 두 번째 수업을 준비했다. 그날은 먼저 수강생들에게 수업 매너에 대한 공지를 하며 시작했다.
"먼저 이 수업은 함께 책을 읽고 각자 쓴 글을 발표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중 화면을 꺼두시면 안 되고, 채팅만으로 참여하거나 단순 청강도 어렵습니다. 마지막 시간까지 서로 존중하며 예의를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몇몇 수강생이 퇴장했다.
"다른 비대면 수업에서는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는데 선생님은 제약이 많으시네요."
라며 채팅창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안고 갈 수는 없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질 높은 수업을 만드는 것이 내 목표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수업에 접어들자 결국 끝까지 공부하고 글을 쓰고 싶은 분들만 남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열 번의 회차를 정성껏 채워가기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그림 에세이> 편이었다. 나는 수강생들에게 '기억에 남는 그림 한 점'을 보내달라고 했고, 역시 그들은 메일과 문자로 성실히 그림을 보내왔다. S님은 가정의 금전 문제로 은행에 들렀다가 우연히 벽에 걸린 클로드 모네의 <수련>을 만났던 날을 회상했다.
'내 마음은 잿더미인데 저 그림은 참 아름답고 평화롭구나.'
그녀는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하루빨리 상황이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말했다. 평소 밝은 성격으로 수업 분위기를 밝혀주던 분이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수강생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해 보여도 각 가정의 현관문을 열면 저마다의 사정이 숨어 있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힘들었던 시절을 조심스럽게 꺼내준 S님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은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정원 연못을 소재로 한 연작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수면 위를 떠다니는 수련을 시간과 계절, 햇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연못의 표정을 포착하며 자연이 주는 고요하고도 찬란한 순간을 담아냈다.
라디오 작가 문하생으로 일하던 시절, 나는 모네 전시회에서 산 <수련> 엽서를 모니터 옆에 붙여둔 적이 있었다. 하루 세 시간의 왕복 출퇴근에 지친 사회 초년생이었던 그때, 나도 S님처럼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지쳐 있는데, 저 그림은 참 고요하고 아름답구나.’
나와 S님은 힘든 시기에 이 그림을 만나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걸까. 같은 시선으로 같은 그림을 바라보던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작은 위안으로 남았다.
그리고 친정어머니의 입원으로 수업 규칙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지만, 끝까지 함께하고 싶다며 조심스럽고도 정중한 메시지를 보내온 J님. 그녀는 빈센트 반 고흐의 <낮잠>을 소개하며 회사 계단을 오르다 우연히 보게 된 그림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나도 저렇게 푹 잠들고 싶다.’
그녀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고 한다. 고단한 일상 속에서 그런 낮잠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담담히 이야기하며, 아마 그 무렵 퇴사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낮잠>은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을 고흐가 오마주한 그림이다.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 머무는 동안 밀레의 절제된 구도와 차분한 색감에 매료되어 그 그림을 자신만의 색채로 다시 그려냈다. 노란 건초 더미, 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강렬한 색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게 느껴진다. 마치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토록 평온한 순간이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J님이 소개한 이 그림을 바라보며 나 역시 육아에 지쳐 낮잠이 절실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무런 방해 없이 깊이 잠들 수 있는 시간, 그림 속 인물들처럼 노곤하면서도 달콤한 낮잠이 너무나도 절실했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어떤 그림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그 그림이 말없이 내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눈을 뗄 수 없고, 자꾸 떠오르며, 다시 마주했을 때 처음의 울림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 그런 그림이 바로 '내 인생의 그림'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글을 통해 한 걸음씩 가까워졌다. 매주 목요일, 그 하루를 기다리는 마음이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점점 깊어졌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가족과의 제주도 2주 살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편의 10년 근속 휴가에 맞춰 겨울방학부터 머무를 숙소를 예약해 두었고, 그렇게 마지막 수업은 제주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노트북을 조심스럽게 챙겨 제주도로 행했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수강생들이 보낸 에세이에 미리 코멘트를 적으며 준비를 마쳤다. 남편과 아이는 수업 시간에 맞춰 둘만의 데이트를 나섰고 조용한 숙소에서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었다.
취업을 준비 중이던 20대 수강생은 학창 시절 친구 관계로 받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썼고, 다른 수강생들은 그녀의 글에 조언을 건넸다.
"어떤 관계는 유통기한이 있어요"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는 떠나보낼 줄도 알아야 해요."
그날 나는 강사이기보다 참관인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삶에 응답하고 있었다. 강사와 수강생의 관계만큼, 글벗 사이의 교류도 수업을 풍요롭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제주의 봄바람이 커튼을 살랑였고, 그날의 수업은 어느 목요일보다도 깊고 따뜻했다. 마지막 인사 시간, 그동안 가장 열정적이었던 Y님은 이동 중에도 끝까지 수업에 참여했다.
"이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참 행복했어요."
Y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첫날 영상이 끊기고 말을 더듬으며 허공만 바라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은 나의 부족함을 감싸 안고, 좋은 부분만 기억해 준 걸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들
나에게 '처음'은 애틋해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꽃샘추위에 시작해서 완연한 봄에 끝난, 나의 첫 에세이 수업. 재능기부를 거쳐 처음으로 정식 강의료를 받고 진행한 수업이기에, 그해 봄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지더라도 그들의 얼굴은 마음속 어딘가에 또렷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쳤을 때 마음이 먼저 반응해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잘 지내고 계시죠? 매해 봄이 오면 여러분이 생각납니다. 그때의 이야기들,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요. 아직 제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 있어요.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