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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곰 Jan 12. 2022

슬픔의 연대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어제 예쁜 글씨로 시를 필사하는 이웃 블로그를 오랜만에 방문했다. 그분이 필사한 시를 한참 보다가 조병준의 <따뜻한 슬픔>이란 시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그 알량한 온기로

서로 기대고 부빌 때, 슬픔도 따뜻해진다.

따뜻한 슬픔의 반대편에서 서성이는 슬픔이 있다.

기대고 부빌 등 없는 슬픔들을 생각한다.

차가운 세상, 차가운 인생 복판에서 서성이는 슬픔들...」


_ 조병준 <따뜻한 슬픔>中



'따뜻한 슬픔의 반대편에서 서성이는 슬픔'이란 구절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몇 달 전에 방송된 <금쪽 상담소>에서 가수 김윤아가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담담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녀의 몸은 절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꼭 '서성이는 슬픔'처럼 느껴졌다. 부모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를 받으면 신경이 남들보다 몇 배나 예민해지고 몸 안의 장기들이 오래 병들 수 있다는 걸 그녀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아동학대에 관련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신고도 가능하며 가해자의 신상정보와 심리상태를 분석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자란 세대와 부모님 세대는 그런 행위들이 암암리에 일어났다. 본인이 고백을 하지 않으면 어제 나와 떡볶이를 먹었던 친구가 부모에게 매질을 당했는지 누군가에게 성폭력을 당했는지 알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세대의 부모들도 가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자식은 부모에게 맞아도 되는 존재가 아니고, 부모가 자식을 때려도 되는 권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림_ 우지현




나는 자우림의 '샤이닝'이란 노래를 며칠 동안 들었다. 노래를 부르는 김윤아의 표정과, 가사에 반응하는 내 마음과, 그 고백으로 또 다른 고백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물꼬가 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같은 경험을 했어요, 내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럼에도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요' 같은 응원들이 조병준 시인이 말한 '따뜻한 슬픔' 같았다. 김윤아의 고백에서 느꼈던 '서성이는 슬픔'이 이런 따뜻한 슬픔들의 연대로 김윤아가 '기대고 부빌 등'이 생겼다고 생각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날 깊은 밤이면 문득 어딘가에서 서성이는 슬픔들이 저마다 홀로 웅크리고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얼굴을 맞대고 위로를 해줄 순 없지만, 따뜻한 슬픔들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고백이 더 이상 수치심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 많은 고백을 꺼내고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야 한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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