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정말 영숙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이 돈만은 쓰고 싶지 않았다. 영숙은 지우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이혼 위자료를 가게 구멍을 메꾸는데 쓰고 있다니, 더러운 돈이라고 싫다고 해놓고, 결국 궁지에 몰리니까 꺼내 쓰는 망각의 모순덩어리 영숙이다.
하필 이럴 때 복직까지 가능하다니, 시기적절하게 혼돈에 혼돈을 더하니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능력 없는 영숙이 이번 복직의 기회를 거부하면 언제 다시 회사에서 불러줄까, 수동적인 영숙에게 가게와 회사를 두고 선택을 하라니, 정말 놀부 말대로 닭대가리 영숙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도대체 정리를,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답답하다. 가게 오픈을 준비하다가, 잠바만 걸치고 무작정 가게를 나선다.
“ 나 나갔다 올게, “
어디 가냐고 지콩이 묻지도 않고, 그저 텅 빈 눈으로 영숙을 쳐다본다. 발정 난 빙구가 떠나면서 특유의 멍청함이 지콩에게 빙의된 것 같다. 놀부도 실없는 농담을 하지 않는 가게는 활기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넷이라서 그래서 좋았나 보다.
골탕 먹일 톰이 없어지니, 제리가 제일 눈에 띄게 기운이 없어졌다. 지콩의 키가 더 작아진 것 같다.
무작정 나온 가게 밖 세상은 춥고 스산한 게 뭐라도 내리려고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그늘진 골목길에는 군데군데 남아있던 눈이 빙판길로 되어버렸다. 노인과 아이들에게 외출 금지령이 떨어졌는지 해 질 무렵의 골목은 조용했다. 너무 얇은 패딩을 입고 나왔나 보다. 몸을 한껏 움츠리고 손은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 걸어도 12월의 못된 겨울은 추웠다.
영숙은 가게를 얼마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블랙아이스 위에서 헛발질을 하며 꽈당 자빠지고 말았다. 창피고 뭐고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엉덩이뼈가 부서진 모양이다. 정말 소리내어 엉엉 울 만큼 오지게도 아팠다.
” 아아~ 너무 아파,
으앙~ 왜 눈 속이냐고~,
왜 나만 바보처럼 자빠지냐고~엉엉,
아아~ 너무 아프잖아, 나쁜 놈 엉엉,
정말 이건 너무해... 흑흑. “
터지고 말았다.
사랑에 눈이 멀어 인수한 가게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일했단 말이다. 공항에서 2교대로 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가게에서 매일 밤 일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공격적인 날을 세운 생닭발을 포대로 씻고 삶아야 하는 공포스러운 낯선 역겨움을 참아냈고, 양팔에 흉터를 남기면서까지 불질을 배웠다. 배달을 구역별로 외우기는 정말 전 세계 공항코드 외우기보다 더 어려웠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아치 직원들과 일하는 재미가 너무 행복하니, 영숙은 처음으로 뭔가에 몰두해 보았단 말이다. 그런데 가게는 자꾸 마이너스라니.
돈이 아니라 억울해서 그런다. 지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만나는 손님들이, 동네 사람들이 좋아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데,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속상해서 그런다.
보상 없는 장사에, 그놈에게 이렇게까지 당한 것에, 그동안 참았던 울분이 자빠진 김에 한꺼번에 터져 버렸다.
바지사장 지콩에게 돈이 없다고, 장사가 어마하게 마이너스라고, 영숙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손대지 않기로 다짐했던 그 돈을 빼 쓰게 된 것이다.
엄마에게서 탈출할 수 있어서 그냥 했던 결혼, 임신, 남편의 이중생활, 그리고 유산까지 육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미루고 있었던 남편은 이혼 위자료를 몹시 아까워하면서도 영숙에게 줘야만 했다. 엄마의 미친 난리를 더는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돈에 대해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살았나 보다. 아니 돈을 알지 못했다. 딱히 아쉬웠던 적이 없었고, 일만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건 줄 알았다. 직장인이었으니까.
이윤이 남는 장사를 해보려고 열심히 팔아봐도 여전히 힘들었다. 초보사장 영숙은 빙판길에 꽈당 넘어지고서야 인정한다. 이건 절대 영숙이 이길 수 있는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무엇이 문제였는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건 처음부터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 가게였다.
이 가게는 매출만 미친듯이 올려 권리금 장사로 되팔아버리려는 작전으로 그놈이 시작한 것이었다. 만만한 먹잇감을 찾지 못했는지, 아님 처음부터 영숙이 타깃이었는지, 모든 걸 바쳐 사랑한 영숙을 마지막까지 쥐어짜서 빼먹고 튀었다. 이걸 어떻게 지콩에게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운영이 어렵다는 걸 돌려 말해도 눈치 빠른 지콩은 알아차릴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처음 두 달은 제대로 계산도 못하고 그저 열심히만 일했다. 너무 생소한 업종이라 일만 익히는데 두 달도 부족했다. 당연히 어리숙한 영숙이 처음부터 가게 경영을 제대로 관리할리 없었다.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니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가게 월세, 직원월급, 국산재료, 배달 앱 사용료에 공과금 등등 지출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기가 막히게도 남을 수 없는 장사였다. 특히나 원재료값이 너무 높아 팔아도 이윤이 남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퍼주는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숙은 왜 지키고 있는 걸까? 왜 이제와서 힘들어하는 걸까?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반사적으로 받쳤던 손바닥이 바닥에 쓸렸는지 쓰리고 아프다. 팔꿈치도 찍어서 얼얼하다. 다른 팔은 어깨가 어긋난 것 같은 통증이 몰려온다. 빙판길에 한번 자빠졌더니 온 전신이 아프다.
그놈 한번 오지게 사랑했더니, 내 온 우주가 아프다.
영숙은 넘어진 걸 핑계 삼아 소리 내어 한참을 목 놓아 울었더니, 속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쓰라린 손바닥에서 피가 조금 나온다. 앞치마로 쓰윽 닦고 일어난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도 피 붙은 검정 앞치마로 대충 닦는다. 그만 울자. 보는 이는 없었지만 그제서야 창피해졌다.
그놈의 계획된 사랑에 돈은 털렸지만, 영숙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강해지고 뻔뻔해지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퍼질러 울 줄도 알고, 다시 털고 일어설 줄 아는 전에 없던 영숙이 되고 있다. 이건 그놈이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 양아치 직원들 덕분이다.
영숙은 그 몰골로 인적 없는 골목길을 다시 걸었고, 큰길로 나가 또 한참을 걸었다. 수많은 간판들이 보인다. 사거리 노른자 자리에 위치한 대형 숯불고깃집, 치킨집, 커피 전문점, 빵집, 24시 감자탕 등, 대로변의 가게들이라 그런지, 망해가는 가게 사장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간판부터 골목 가게와 다르게 때깔부터 달라 보인다.
' 저들은 자본도 많고, 경험도 많고, 돈도 많이 벌고 있겠지. '
또 씁쓸해진다. 그때 멀리서 요란스럽게 사이렌 소리의 구급차가 다급하게 지나간다. 마치 영숙에게 너무 오래 가게를 비웠다고 빨리 가게로 돌아가라고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다시 골목길로 들어와 가게로 돌아왔다. 오지게 넘어져서 아팠지만, 그래도 걸을만 했고, 딴 생각에 빠져 한참을 걸어 가게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래서 영숙은 선택을 한 것 같다.
“ 지콩~ 가게 간판은 왜 안 켰어? 놀부는 배달 갔어? 나 뭐 하면 되니? ”
“ …”
가게 문을 열면서 주방에 있을 지콩에게 왔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대답이 없다. 너무 오래 비워서 또 삐졌나 보다.
“ 콩아~ 나 뭐 하면 되냐고? 많이 바빴어? ”
바뀐 것 없는 가게에서 영숙이 갑자기 힘이 난다. 그런데 주방에 지콩이 없다. 어디 갔지? 주방을 이렇게 엉망으로 해놓고 자리를 비우다니, 빙구가 떠나고 지콩이 확실히 이상해졌다.
너저분한 주방을 정리하면서 기다리다, 문득 싸한 기분이 들었다. 다급하게 지콩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놀부도 받지 않았다. 가게 모든 일을 멈추고 핸드폰만 쳐다보며 얼마나 지났을까, 지콩에게서 전화가 왔다.
“ 지금 대학병원 응급실이야. 놀부 사고 났어. “
” 뭐라고? “
“ 나도 아직 응급실에는 못 들어가고 있어. 코로나 검사결과 나와야 들어갈 수 있대.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전화할게. ”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