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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이 May 03. 2024

안녕 빙구

신기하다. 장사가 되려고 하는 건지, 진상들을 쫓아내니 재밌는 손님들이 가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 나 여기 너무 좋아. 닭발 국물도 끝내주게 칼칼하고, 오빠야들도 너무 개성 있게 생겨서 너무 좋아. "


" 맞아, 추울 때는 이게 최고지, 속도 풀리고 술도 깨는 것 같아. 그치?"



" 근데, 미미가 여기 알려주면서 소문내지 말라고 했는데 , 재네들은 뭐니? 여긴 단속 뜨면 안 되는데 말야. “


"그르게 말야. 근데 어쩔 수 없어. 요즘 이 시간에 갈만한 곳이 없잖아. "



가게에서 골목길을 조금만 더 올라가면 원룸촌과 신축 오피스텔이 있는데, 주안역에서 택시 기본요금 거리라 그런가, 그곳에는 밤일 나가는 언니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면서, 매운 닭발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 단골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중 몇이 가게에 와서는 국물 닭발에 소주를 맛나게 먹고 간 뒤로, 밤일하는 언니들이 쉬는 날은 핑크 추리닝에 모자 푹 눌러쓰고 와서 초저녁 해장을 하던지, 해뜨기 전 퇴근길에 들러 해장술을 하는 곳으로 조용히 알려졌다.

심야영업이 금지된 시국에 상권에서 멀리 떨어진 초등학교 앞 노후된 주거지역이라는 점과, 간판만 끄면 식당인지 인쇄소인지 밤에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시커먼 가게 외부가 불법영업의 적소가 된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밤일 나가는 사람도 불법이고, 늦은 밤 식당에 손님을 받는 불난 야식도 불법이라, 서로 합의는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불법 동맹은 맺어졌다.






영숙은 가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 덕분에 늘 품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아픔은 많이 무뎌졌고, 성격은 전에 없던 활발함이 생겼다. 어린 영숙을 소환시켜 가슴을 후벼 팠던 꼬마 지호는 가게를 지 집처럼 들락거리며 영숙과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고, 지호아빠는 수시로 혼술 하러 들락거리고 있다.

영숙은 요즘 좋아하는 하늘 구경보다, 밤일 나가는 언니들을 가게에서 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가식 없이 툭툭 던지는 말투와 목젖까지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대는 모습은 예쁜데 야생적이고, ‘인생 뭐 있어 오늘만 살자' 하는 술잔 앞의 쿨내 나는 멋짐은 영숙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밑바닥 쓴맛을 경험한 자만의 멋짐이 있었다.

그중 유난히 가게의 어두운 조명에도 성형으로 도배된 게 확연하게 보이고, 나이도 제일 많아 보이는 언니가 있다. 긴 외투 속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는 가게에 들어오면 첫 잔과 더불어 과감하게 드러낸다. 소주를 마시는데도 진한 위스키 같은 세월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농익은 성괴이다.


직원들은 이 언니들만 오면 정신을 못 차린다. 주방일은 뒷전이고 수시로 홀에 나와 괜히 어슬렁거렸다. 허기야 여자인 영숙도 그녀들의 매력에 빠져 계산대에 앉아서 대놓고 대화를 훔쳐 들으며 같이 웃고 있는데, 한창 예쁜 여자 좋아할 나이의 직원들은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그런 영숙을 보고, 성괴 언니가 말을 걸어왔다.



" 언니, 이쁘게 생겼네.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우리 가게 오지 그래 인물이 아깝다. 호호. "


" 저기요, 이 아줌마는 닭발집 도우미지,  노래방 도우미가 아니거든요. "


" 어~ 그런가? 호호호 "



지콩이 쪼잔하게 끼어들어 영숙을 막아버렸고, 성괴언니는 지콩의 빈정거림에도 쿨하게 웃어넘기는 너그러움이 보였다.

그녀들은 매운 닭발에 술을 쭉쭉 들이키며 벌써 몇 병째 까고 있는지 대단했다. 하루종일 굶었는지, 아님 술김에 먹는 건지 날씬한 몸에 그 많은 양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국물 닭발에 치킨에 주먹밥에 계란찜을 아낌없이 추가 주문을 하면서, 먹고 마시고를 추태도 없이 깔끔하게 뒷 마무리 팁까지 주는 완벽하게, 진정 먹을 줄 알고 쓸 줄 아는 멋진 손님들이었다.






어느 날 혼술하러 온 지호아빠를 보고는 전문가답게 성괴언니가 영숙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 내가 남자를 좀 알잖아, 저런 얼굴 정말 조심해야 해. 잘 생겼는데 왠지 우수에 쩔어있는 분위기, 특히 저런 눈망울은 위험해. 우리 애들도 저런 눈에 빠져서 영혼에 돈까지 싹 털려서 여럿 갔잖아. 언니도 조심해야 해."


“ 어머 어머, 울 언니 말 잘하는 것 좀 봐, 맞아 맞아, 필이 딱 그러네. ”



영숙은 지호아빠의 외모에만 반했지 다른 건 생각도 없는데, 언니들은 안주거리가 필요했는지, 아님 지호아빠가 영숙을 보는 눈빛에서 끈적이는 뭔가를 발견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난 그래서 저기 키 큰 오빠처럼, 그냥 순수하게 맑은 눈이 좋더라. ”


언제 눈여겨봤는지 빙구를 가리킨다. 우리 눈에는 그저 생각 없이 텅 비어있는 눈동자가 성괴언니 눈에는 순수한 맑음으로 보이다니, 은근히 뭔가를 기대하고 있던 지콩과 놀부가 헛웃음을 처댔다. 특히나 질투에 찬 놀부가 대놓고 성질을 냈다.


“ 지콩아, 그래도 빙신보다는 내가 낫지 않냐? ”


“ 음... 그래도 너 보단 빙구가 나아. “



멍청하게 그저 여자 구경하고 있던 빙구는 자신을 지목하는 것에 쑥스러웠는지,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봐봐 웃는 것도 순한데, 부끄러워하는 것도 너무 귀엽잖아. 호호호. ”



자꾸 빙구를 입에 올리는 게, 영숙은 걱정이 앞섰다. 저러다가 또 흉한 꼴 당하는 거 아닌가 싶은 게, 딱 봐도 빙구보다 열 살은 훨씬 넘어 많아 보이는데 말이다. 영숙의 오버스런 걱정에 지콩이 어이없어했다.



“ 미쳤냐, 저 여자가? 뭣하러 빙구를 꼬셔? 누나가 몰라서 그러는데 울 가게 오는 애들 노래방 도우미 아냐. 아무튼 알면 다치니까, 그건 신경 끄고 걱정 마. 쟤들 눈 높아. ”

 


허기야 영숙이 뭐라고,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가? 직원들의 진짜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잠시 오버했던 생각이 부끄러웠다.

유쾌한 손님들의 가벼운 대화는 화로 냄새와 기름냄새에 찌든 가게를 웃음 바이러스로 정화시켜주고 있었다.






월요일은 주문도 적고 다른 날에 비해 한가했다. 무엇보다 일주일의 유일한 휴일 화요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눈이 오려나, 학교 넘어 하늘이 찌뿌둥하니, 무거운 뭔가를 쏟아낼 분위기다.



“ 누나, 우리 오늘 간만에 일찍 닫고 우리끼리 한잔하자.”


“ 날씨가 그런데, 그럴까?”



지콩의 주도로 갑작스런 회식 확정에 놀부가 신나서 비장의 요리를 선보이겠다고 했다.



“ 내가 오늘을 위하여, 특식을 만들어 주겠다. “



배달만 하는 놀부도 다년간 요식업에 종사해 왔고, 손도 지콩 못지않게 빠르다. 단, 빙구를 써먹을 때가 없으니 놀부가 배달을 맡고 지콩이 주방과 빙구를 맡은 것이지, 놀부도 요리를 썩 잘하는 편에 속했다. 스피드하게 한상 푸짐하게 만들어서 회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우와~ 이게 다 뭐냐?”


“ 왜 맨날 매운 거만 먹냐고, 그래서 단짠으로 만들어봤지 ㅋㅋ.”



간장 찜닭에, 대패오돌뼈도 간장으로 양념하여 불맛을 낸 끝내주는 안주였다.


애주가 넷이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한참 잘 달리고 있는데, 누군가 간판 불 꺼진 가게 문을 확 열고 들어왔다.



“ 앗! ㅅㅂ 깜짝야! ”



직원 셋은 놀라 욕이 절로 나왔고, 영숙은 먹던 안주를 떨어트려 버렸다. 모두 단속이 뜬 줄 알고 놀랐는데, 성괴언니가 환호하며 허락도 없이 합석을 해 버렸다. 그녀는 이미 취해 있었다.



“ 야호~ 내 이럴 줄 알았지. 불 꺼진 가게에서 술 냄새가 우리 빠까지 솔솔 나더라고 ㅎㅎ“



다들 어이없어 쳐다보고 있는데, 어느새 빙구가 수저와 술잔을 준비해 성괴언니 앞에 세팅해 주었고, 우린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 자기들~ 내가 자기들 너~무 사랑하는 거 알지? 나는 말이야~ 고딩때 미친 집구석 뛰쳐나와 인천까지 흘러왔지만 그래도 부모 원망 안해. 지들도 사는 게 고달프니까 그 따구로 새끼들 키운 거겠지. 여기 관상들 보니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인생 너무 억울해하지 말자. 지난 거 미련도 갖지도 말고, 그냥 오늘만 재밌게 잘 살자고, 자자 그런 의미에서 짠하자. 오늘만 위하여~ “



슬슬 취기에 분위기 업 되고 있던 우리들의 회식은 초대하지 않은 성괴언니의 주도로 더 취해 버렸고, 옆에 앉은 빙구의 가녀린 어깨에 성괴언니는 육덕진 몸을 기대며 묻지도 않은 개인사를 털어놓더니, 성괴언니는 술과 혼자 말에 취해 있었다.



“ 난 이 가게가 너~무 좋아. 사람들이 오합지졸인데 신기하게 어울려. 다들 서로 아끼는 게 내 눈에 보이거든. 그래서 그런가 칙칙한 이 가게가 따뜻하게 느껴진단 말야. ”



옆 자리 빙구만 성괴언니의 개소리를 깊이 새겨듣고 끄덕이고 있었다. 눈치 없는 영숙은 모르고 있었다. 첫눈이 퍼붓던 이날 성괴언니와 빙구가 서로에게 눈이 맞아 버린 첫날이었다는 것을.


그 뒤로 성괴언니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가게로 왔고, 빙구는 점점 인물이 나기 시작했다. 얼굴은 환해지고, 비어있던 눈이 생기가 도는 것 같기도 한게, 묘하게 사람이 바뀌고 있었다.



“ 지콩아, 빙구가 원래 저렇게 귀엽게 생겼어? 살도 오르고 인물도 나는 것 같아. “


“으이그, 이 누나 눈치가 없는 건지, 역시 머리가 닭인 건지. ”


“ 놀부! 너 또 놀리지 마. 요즘 내가 일 잘하는 거 알면서 왜 또 그래? ”


“으이그~ 이 답답아, 빙구 저 새끼랑 성괴누나랑 사귀잖아. 그걸 여태 눈치 못 채고 있었냐? ”



뭐라고?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나이 차이가 얼마인데? 성괴언니가 뭐가 궁해서 어린 빙구를 굳이 좋아해? 그리고 빙구가 나이 많은 여자를 무서워해야 할 빙구가 왜? 영숙은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러브라인이었다.



“ 저 둘은 이미 죽고 못 사는 사이야. 오늘만 뜨겁게 사랑하자. 주변 눈치 안 보고 오직 둘만 보기로 했다나 뭐라나, 암튼 냅둬. 둘 다 손해 볼 거 없으니까. “


“ 글치, 둘이 사귄다고 간섭할 가족도 없으니까. ”




영숙이 봐도 안 어울리는 이 커플이 영숙은 부러웠다.

사실 영숙은 한 번도 뜨겁게 사랑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해 주면 어떤 기분일까? 정말 온 우주가 내 것 같은 기분이 아닐까 싶다. 영숙이 그렇게 사랑했던 그놈이 영숙을 한 번만 제대로 사랑을 줬더라면.

지금 서로를 사랑하는 저 둘만의 우주는 어떤 곳일까, 눈물 날 정도로 부러웠다.






지콩의 예언대로 빙구는 떠났다. 역시나 발정 난 똥개는 잡을 수 없었다. 성괴언니가 닭 그만 튀기라는 말에, 같이 살자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우리를 떠났다.

그림자처럼 일하던 빙구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휑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우리를 떠나버리다니, 배신감마저 들 정도로 빙구의 빈자리에는 남은 그림자만 얼쩡거리고 있었다.



“걱정 마 누나, 그 새끼 겨울 지나면 나한테 돌아올 거야. 신경 끄고, 예쁜 여자 알바로 구해주라. ”



장사는 잘되는데 영숙의 사비로 메꾸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 겨울만이라도 가게를 지켜내고 싶은데, 바램과 달리 현실은 버거워지기 시작했고, 때마침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 김영숙 씨, 다음 달부터 복직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고 이번 주까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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