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이 Apr 19. 2024

최고령 손님

92세 최고령 할머니


누나, 빙신처럼 혼자 계속 그래라. 사람 힘 빠지게...


나 배고파, 닭발 먹고 싶어.


지콩이 보낸 문자에, 영숙은 그렇게 답을 보냈다.


영숙은 출근하자마자, 처음 가게에 왔을 때 그놈이 차려줬던 그 메뉴 그대로 정성껏 만들어서 미친 듯이 먹어치웠다. 김가루 잔뜩 넣어 만든 주먹밥에 닭발을 올려 크게 한입 먹고, 계란찜은 짤게 쑤셔 음료처럼 마셨다. 크림양파 소스에 담가버린 치킨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매운 불닭발에 푸딩 계란찜은 역시 위로가 되는 맛이었다. 그 모습을 직원들이 구경하든 말든 오직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 누나, 임신했어? “


“ 며칠 잠수 타더니,  숟가락 사용하는 거 까먹었어? 왜 자꾸 무섭게 손으로 먹어대.  ”


“ 누나가 이상해. 저걸 다 먹어치워. 나보다 많이 먹는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 봐. “


지들 식사에는 입도 안 대고, 말 없는 빙구까지 영숙의 미친 먹성에 한 마디씩 떠들어댔다. 영숙이 출근만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영숙이 미친 식욕을 보이자, 여자들이 성욕보다 무서운 게 식욕이라며 저렇게 눈 돌아가서 먹을 때는 절대 건드리면 안된다는 지콩의 조언에 따라, 무단결근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연휴가 지난 가게는 한산했고, 그동안 얼마나 바빴는지 짐작이 갈 만큼 재고는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이번주는 주문도 급격하게 줄 것이니 내일까지 썰렁썰렁 일하겠다며 직원들은 파업 비스무리하게 선언을 했고, 잔일거리와 오픈 준비는 몽땅 영숙에게 넘겨졌다. 출근하면 가만 안 두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봐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며, 양아치는 자기들이 아니라 가장 바쁜 연휴기간에 잠수를 탄 사장이 양아치라며, 끝내 놀부는 뒷끝 있는 한소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빠져서 뇌진탕 안 걸린 게 신기할 정도로 미끄덩거리는 주방 바닥을 닦고, 텅 빈 냉장고에 기본 반찬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 넣으면서, 영숙은 한산한 가게에서 혼자 정신없이 콩쥐처럼 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상쾌해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엄청 먹었지만 배는 그저 든든한 포만감 정도였고, 며칠 이불 안에서 꼼짝 않고 있었던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니 찌뿌둥함이 풀어지고 있었다.  꼬마 지호를 만나 구멍 났던 마음도 닭발과 치킨로 가득 메꿔졌고, 생각도 둔해진 것이 다행이다. 공항에서 먼지처럼 존재감 없이 일했었는데, 이 작은 가게에서는 드디어 존재감을 발휘하는 나만의 우주가 생긴 것 것 같다. 진작에 가볍게 생각하고 살것이지, 혼자만의 세상에 들어가서 왜 바닥까지 찍어야지만 일어서는지 희한한 성격의 영숙이다.

며칠 잠수타고 나타나서 티라노처럼 먹어대더니 노래까지 흥얼대며 즐겁게 일하는 영숙의 모습을 보고, 지콩이 홀에서 핸드폰 삼매경에 빠진 빙구에게 소리쳤다.


“ 야~ 빙신아! 니가 처먹는 약 아무거나 누나 좀 먹여봐. 완전히 맛이 갔어. ”


“ - - - ”


그러든가 말든가 캠핑의자에서 눕다시피 쓰러져 핸드폰에 빠진 빙구는 빙구답게 대꾸도 하지 않았고, 영숙은 주방에서 혼자만의 우주를 즐겼다. 그렇게 주문은 없었지만 각자의 주어진 휴식과 노동에 빠져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가게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주방까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놀부가 혹시 지나가는 행인을 패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불길한 예감에 영숙과 지콩이 동시에 가게를 뛰쳐나갔다. 예상대로 놀부가 자그마한 아저씨와 대판 싸우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패지는 않고 있었다. 아니 곧 팰 기세였다.


" 야! 이 새끼야, 너는 애미 애비도 없냐? 이거 좀 가져가겠다는데 뭔 지랄을 이렇게 해대는 거야?"


"와~ 씨, 나 부모 없는 거 어찌 아셨누? 아비는 죽었고, 어미는 날 버렸다. 그게 왜? 니가 내 애비야? 어따 대고 지랄이야! 내가 이거 내 꺼라고, 가져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왜 자꾸 도둑놈처럼 맨날 몰래 가져가는 거야! "



" 밖에다 내놨으니까 가져가지. 못 가져가게 하려면 안에다가 처박아 둬야지. 왜 여기 두고 지랄이야."


" 뭐어? 지콩아~ 나, 오늘 말리지 마라! 기냥 빵에 한번 더 갔다 올란다. 미리 짭새 좀 불러놔라! 오늘은 도저히 말로 안되겠다. 오늘 기냥 깽값 물란다."



놀부가 그처럼 화를 내는 것을 영숙은 처음 봤다. 정말이지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아저씨가 간 크게 물러서지도 않고 맞대응하는 모습에 놀부가 폭발할 것 같아, 영숙은 지콩을 붙잡고 말려보라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지콩은 프로답게 즐기며 특기인 깐죽거리기를 시작했다.


" 어이~ 아저씨, 우리가 빵을 쫌 들락거려서 법을 쫌 아는데, 가게 밖이라도 건물의 소유 공간이면 그게 종이상자이건 뭐건 주인 허락 없이 가져가면 절도죄라는 거 몰라? 그럼, 아저씨는 마트 앞에 빈병 쌓아둔 궤짝도 막 가져가겠네. 여기, 여기는 도로변이 아니고요~. 가게 건물이라고요~.  건물에 상자가 곱게 쌓여 있는 거 안 보이슈? 음... 안 보이는 것 같으니, 일단 시민의 안전 도우미에게 신고 먼저 하고, 안되면 우리 법대로 하고 깽값 물어버리자. 놀부야! “


불난 닭발의 브레인이자, 신고 전문가 지콩이 정말로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버렸다.


" 거기 경찰서죠? 격무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여기 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야식집 사장인데요. 누가 가게 앞에 둔 물건을 자꾸 훔쳐 가려고 해서 신고합니다. 학교 앞이라 CCTV가 있으니, 증명이 될 겁니다."


" 에이~ C, 더러워서 안 가져간다. 에이~ 퉤!!! "



그냥 물러서기가 거시기했는지, 아저씨가 간 크게 놀부 앞에 침을 뱉고 가게 앞에 불법 주차한 트럭을 잽싸게 몰고 휑하니 도망가 버렸다. 침에 격분한 놀부가 뛰어가 트럭을 잡으려고 하자, 지콩이 놀부에게 매달려 겨우 말렸다. 가게에서 나온 각종 폐지 같은 종이상자가 뭐가 그리 귀하다고 동네 시끄럽게 싸움까지 하는 건지, 역시 양아치다.

한바탕 소란 때문인지 주문도 거의 없었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놀부는 종이상자가 비에 젖을라 다시 가게로 모셔다 놓고, 직원들은 빈둥대다 퇴근했다.






다음 날 비는 그쳤고, 날씨는 화창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직원들은 오늘까지 예고한 파업 태세로 빈둥대며 놀았고, 영숙은 대파를 사기 위해 동네 마트로 갔다. 불난 야식의 모든 요리에는 매운맛에 풍미를 더해주는 파와 마늘의 역할은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도 주문은 없겠지만 미리 챙겨 두어야 한다. 대파 한 단 사 들고, 가을비가 쓸고 간 깨끗한 골목길을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걸으니 좋다. 하늘까지 깨끗해 보였다.


골목 동네 유일한 빵집 앞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유모차에 종이상자를 쌓고 있었다.

빵집에서 건네받은 상자를 차곡차곡 쌓고 계셨고, 풍채 좋고 마음씨 좋게 생긴 빵집 여사장이 분주하게 도와드리더니, 가게에서 빵 몇 개를 봉지에 담아 할머니 손에 쥐어 드렸다. 선뜻 받지 못하시는 할머니께 빵집 여사장이 거절 못하도록 후딱 드리고는 가게 안으로 튀어 버렸다. 할머니는 닫힌 가게 문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는데, 왠지 서로에게 익숙한 일과처럼 보였다.


가게에 돌아온 영숙은 오늘도 콩쥐처럼 혼자 오픈 준비를 했다. 어제처럼 준비할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냥 혼자 주방에서 부지런을 떨었다. 어디서 놀다가 나타났는지, 놀부가 가게 안으로 급하게 들어와서는 홀 한쪽에 모셔져 있는 종이상자를 분주하게 밖으로 나르며,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있는 빙구까지 합세를 시켰다. 영숙은 영문도 모른 채 주방에서 뛰쳐나갔다. 놀부가 오늘은 또 누구와 붙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콩을 데려가야 하는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게 밖에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아치 놀부가 선행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폐지 사수대처럼 지키고 있었던 종이상자를 빵집 앞에서 봤던 꼬부랑 할머니의 유모차에 쌓고 있었다.

할머니의 작은 유모차에 담기에는 종이상자는 너무 많았다. 할머니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높이까지만 가져가시겠다며 욕심을 내려놓으셨는데, 놀부가 놀부답게 욕심을 부렸다.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마트에서 쓸 것 같은 지게를 구해와서는 종이상자를 깡그리 쌓고, 할머니 유모차에 있던 종이상자도 싹 쓸어 올려버렸다. 그리고는 가게 안 창고에 아직 물건이 담겨 있는 종이상자도 비우고 가져가, 키보다 높게 쌓아 올려가지고는, 빙구가 옆에서 기울지 않게 받치도록 지시했다.




“ 할머니~ 금방 다녀올게. 가게 안에서 기다려요. 누나, 계란찜은 짜지 않게 파 넣지 말고 포장하고, 주먹밥은 할머니 배탈 나니까 날치알은 빼고 포장하고, 오뎅은 지금 드시게 두 개만 삶아서 종이컵에 담아 드려. 그리고, 나 큰길 건너 고물상에 금방 갔다 올 거니까, 할머니 어디 못 가시게 잘 지키고 있어. “


할머니는 놀부보다 낯선 영숙에게 더 미안해하시며 어쩔 줄 몰라하셨다.


“ 자꾸 이 늙은이만 보면 저래서 몰래 돌아가는데도 오늘은 잡히고 말았네. 미안해요. 일 하는데…”


“ 아니에요, 저희 하나도 안 바빠요. 편하게 계세요. ”


말 주변이 없는 영숙이 고작 안 바쁘다는 말로  할머니를 가게 안에 모셔 둘 수가 없었다. 놀부가 시킨대로 다 준비하고 할머니를 지키려고 사수했지만, 할머니께서는 누추한 옷차림으로 가게 안에 있는 것은 실례라며 가게 앞에서 놀부를 기다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인자한 미소의 할머니는 가게 앞에서 그리운 손자 기다리시듯이 놀부를 기다리셨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할머니의 미소를 비추고 있었다.





멀리서 놀부가 뱃살을 출렁이며 달려왔다. 살찐 킹콩이 가을 오후 긴 그림자를 등에 업고, 골목길을 쿵쿵 울려대며 뛰어왔다.


“ 에고, 미안해라. 매번 이래서 내가 어쩌나, 이 늙은이가 염치가 없어요. 고맙습니다. “


“ 할머니,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매일 오면 이만치 쌓이지도 않고 우리도 좋은데, 맨날 몰래 도망가니까 그렇지. 이제 매일 오는 거다. 알았죠? ”


놀부가 반존댓말로 어르신을 혼내다니, 역시 싸가지는 없는 녀석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또 거짓 약속을 했고, 한입도 먹지 않은 어묵은 종이컵 그대로 유모차에 꽂고, 계란찜과 주먹밥은 누구를 주려는지 유모차 깊숙이 숨겨, 구부러진 허리를 유모차에 의지하며, 위태롭게 골목 안쪽으로 사라져 버리셨다.

가을바람에 할머니의 옷깃이 쉽게도 팔랑거린다. 곧 추워질 건데... 영숙은 문득 처음 이 동네 골목길을 운전하던 날, 할머니의 유모차가 길을 막아 천천히 뒤따라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름에 입기에는 더워 보였던 그 옷차림이 가을이 지나가려니 추워 보였다. 어느새 나타난 지콩이 영숙의 마음 한켠을 읽었는지 훈수를 둔다.




“ 이 동네 최고령 할머니셔, 우리보다도 가방 끈도 길어. 북한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전쟁 나서 첫째라고 먼저 남쪽으로 피난을 보냈대. 그리고 아직까지도 가족들 소식도 모른대. 정부에서 알아봐 줬는데 마을이 흔적도 없어졌다나 봐. 손주랑 둘이 사는데 우리보다 더 골칫덩어리인가 봐. 놀부랑 저 할머니랑 뭐가 통하는지 둘이 서로 디게 위해. 암튼 누나, 이 동네에는 사연 없는 사람 없어. 꼬맹이부터 최고령 할머니까지.

그니까, 누나만 세상 더 당한 것처럼, 빙신처럼, 사람 힘 빠지게 굴지 말라고! 알았지? 약속하는 거다! “


응, 그럴려고 많이 먹었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