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박애경 너 잔발 안 쓰나? "
벌써 몇 통째인가. 시장에서 구순옥이 엄마가 사다 준 하늘색 바구니에 공을 한가득 날라주는 족족이 코치는 애경에게 공을 퍼부어댔다.
" 라켓은 올리고! 요눔의 짜슥~ 고작 십분하고 헉헉거리면 언제 일등 할끼고. 니 일등 하고 싶다고 안 캤나? 어허~ 또 또 라켓 내려간다. 올려 더 더 더 왼팔 탁구대 잡지 말고! “
코치는 배 나온 악마였다. 탁구부에 들어간 초기에만 천천히 나근하게 가르쳐 줬고, 본격적으로 4학년 탁구부원이 일곱 명만 남게 되자 본성을 드러냈다. 어린 소녀들이 이겨내기에는 버겁고 혹독한 훈련의 시작이었다.
코치가 끝없이 넘기는 공들을 받아내기에는 애경은 아직 작았고, 탁구대는 넓고 높았다. 벌써 몇 박스째인가, 애경은 울먹이며 공에게 끌려 다니기 바빴고, 결국 끝없이 들이붓는 공들을 감당할 수 없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코치는 멈추고 애경에게 한마디 던졌다.
“ 그만 짜라. “
그 모습을 구순옥이 부지런히 공을 주어 나르며 곧 자기에게도 닥칠 공포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 니가 머리 좋고 잔재주가 좋으면 머하노, 남들보다 작고 공의 파워도 약한데. 그런 약점이 있으면 따블로 독하게 해야 하는기라. 힘들다고 울면 실력이 자동빵으로 느나? 힘이 키워지나? 울기는 와 우노. 독하게 이겨내고, 독하게 집중해야 일등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그라. 고마 짜고, 십 분만 쉬고 강당 열 바퀴 더 뛰그라. “
매번 애경이의 눈물 젖은 볼 박스 스토리이다. 수많은 공을 몇 통이나 던졌는지 낡은 유리창에는 서리가 껴 있는데 배불뚝이 홍코치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체육관 안 유일하게 있는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낸 코치는 밖으로 나갔다. 이진이는 애경이에게 유난히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코치가 미웠다. 그리고 애경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번 힘에 겨워 울면서도 내일 또 신나게 체육관 문을 활짝 열고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까지 탁구가 좋은지 아니면 코치한테 빚진 게 있는지 오늘 집에 갈 때 물어볼 작정이다.
애경은 가뿐 숨의 여유가 생기자 다시 일어나 체육관을 뛰기 시작했다. 코치도 없는데 대충 몇 바퀴만 뛰면 될것을 눈물자국이 아직 남아있는 얼굴로 열 바퀴를 다 뛰고서야 주저앉았다.
찬 바람을 몰고 들어온 코치는 원득연을 불러 포핸드 드라이브 볼 박스를 시작했다.
“ 야 야! 그게 아니라카이. 공이 ‘딱’ 소리가 나면 우야노, 공이 빙그르르 돌아가는 ‘폭’ 소리가 나게 드라이브를 걸어 올려야하는 기라고 몇 번을 말했노? 자 다시! “
오른 손잡이가 대부분인 탁구에서 왼손잡이의 포핸드 드라이브는 상당히 받기 까다로운 공은 맞지만, 그 만큼 코치의 요구사항도 까다로웠다.
“ 니 샘이 몇 번을 말했노? 드라이브 걸기 전에 준비 자세는 허리캉 무릎은 약간만 숙이고, 팔은 무릎까지 내리고 있다가, 공이 넘어오는 게 보이면 그때 허리 무릎 팔을 동시에 일으키라고 안 했나. 근데 니는 와 쓸데없이 드라이브 거는데 다리 한 짝은 와 드노? 중심 잡고 있어야 하는 다리를 와 들어쌌노? 체육관 뒤에 있는 토깽이 깜순이가 니 보다는 드라이브 더 잘 걸겠다. 고마 저짝에 거울 앞에 가서 스윙 오십 번 하고 다시 온나. “
탁구부가 키우는 토끼보다 머리 나쁘다는 소리가 서러웠는지, 어김없이 울보 원득연이 누런 코를 훌쩍대며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으로 라정애가 불려 가서 볼박스를 시작했다.
백핸드 쪽 코너를 돌아서서 드라이브를 걸고 포핸드 코너로 오는 공을 스매싱하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시켰다. 왕눈이 라정애는 우리 중 가장 비실대는 친구라 볼 박스를 두 통을 끝내지도 못하고 퍼져버렸다. 그런 하체로 어떻게 스피드 한 탁구 공을 받아쳐서 득점으로 이어낼 수 있겠냐는 코치의 극대노를 이진이도 인정한다. 라정애는 정말 대왕 비실이 하체를 가지고 있다. 볼 박스고 뭐고 잔뜩 화가 난 코치는 라정애에게 저쪽 구석으로 가서 만세 점프 스쿼트 오십 개를 명령했다.
다음 타자는 구순옥이었다.
겨울 해는 빨리 집에 가려고 낡은 창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예상보다 애경이에게 많은 시간을 흥분했던 코치는 구순옥은 볼 박스 세 통으로 끝을 냈다. 그렇다고 구순옥이 울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홍코치는 짧게 굵게 구순옥을 혹독하게 볼 박스를 시켰다.
마지막으로 남은 강미옥은 은근히 볼 박스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오늘도 코치는 시키지 않았다. 사실 코치는 강미옥에게 탁구를 치지 말고 공부하라고 꼬시는 중이다. 강미옥 아빠는 운전병이 모는 지프차를 타고 다니는 아주 높은 군인이라고 했다. 강미옥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탁구가 늘지 않는 신기한 아이라는 것을 홍코치는 알아차린 후에는 강미옥에게는 절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친절하다. 아마 미옥이 아빠의 높은 지위가 한몫을 한 것일 것이다. 밖은 이제 아주 깜깜해졌다. 이진이는 왠지 오늘은 시간상 볼 박스 패스의 행운이 올 것 같아 은근히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 홍코치 나쁜 놈은 그런 행운을 이진이에게 주지 않았다.
“ 우리 이진이 일루 온나. “
코치는 몹시 잔인하게 웃으며 이진이를 볼 박스 앞으로 불렀다.
“ 니 안 하는 줄 알고 좋았재? 샘이 신나게 부어 줄게 함 해볼까나~ 나머지는 다 공 주워라. 우리 이진이 볼 박스 공 떨어지지 않게. “
이진이는 수비수로 움직이는 범위가 다른 애들에 비해 월등히 넓었다. 아무리 이진이가 또래에 비해 키가 크다고 하지만 코치가 포핸드에서 백핸드로 넘기는 공은 너무 깊었고 팔을 뻗었도 헛스윙이 다반사였다. 코치는 슬슬 이진이에게 윽박지르며 드라이브로 걸어 볼 박스의 공을 넘기느라 자신도 바빴다.
“ 야! 니 팔만 뻗을래? 다리 안 가나? 다리! 다리가 먼저 가고 그 다음에 스윙을 해야지, 팔만 왔다 갔다 하면 되는 줄 아나? 니 오늘 하루죙일 내캉 할 끼가? 니 똑바로 안 하면 전부 다 오늘 집에는 다 간 줄 알아라. “
대각선으로 넘어오는 공을 탁구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받아야 하는 수비수라니, 이진이는 수비형 라켓을 구해 온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빼 돌리는 아재와는 이제 인사도 안 할 것이다.
“ 더 더! 더 가서 스윙하라고. 마! 안 들리나? 빨리 안 움직일래? 오야 니 오늘 하루죙일 해보자. 누가 이기나. “
결국 이진이도 울음보가 터졌다. 그런데도 코치는 볼 박스 안에 남아있는 공을 다 해치우고서야 멈췄다.
“ 자, 빨리 공 주워라. 밖에 깜깜타 어여 공 줍고 주변 정리하고, 빨리빨리 움직여라. “
남다르게 운동신경의 강미옥과 뱀에 발가락을 물린 이상경을 빼고, 코치는 볼 박스를 시킨 애들을 전부 울려버렸다.
고작 4학년인 여자애들을 울리고 늦은 밤까지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다니, 윗몸일으키기 백개는 왜 더 시키는 건지, 오늘 당장 집에 가서 엄마한테 진짜 탁구 안 한다고 얘기할 것을 다짐하고 이진이는 체육관을 나왔다. 씩씩대며 교문을 나서다가 체육관 뒤 코치의 집 앞 아니 학교 관사 앞에 사는 토끼들에게 인사를 안 하고 나온 게 생각났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애경이가 겨울밤의 느티나무는 너무 으스스하니 그냥 가자고 했다.
‘ 그래 내일 보고 풀도 많이 갖다 주지 뭐. ’
아직 어린 소녀에게 겨울밤 학교는 발설하게 어둡고 으스스했다. 애경이는 옆에 이진이가 없었다면 훈련에 지친 다리로 집까지 또 뛰었을 것이다. 애경이는 자연스럽게 이진이 손을 찾아 잡았다.
“ 이진아, 나는 니가 같이 있어서 좋다. 탁구도 좋고. “
탁구가 좋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와 니가 좋다는 설레는 고백에, 내일부터 탁구를 안 하겠다는 이진이의 다짐을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집에서 맨날 혼자인데 조금만 더 애경이와 탁구를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글라? 나도 니가 좋은데. “
“ 맞나? 나는 동생들 밖에 없어서 언니 있는 친구가 부러웠는데, 니는 꼭 언니 같다. “
“ 맞나? 나는 동생이 없어서 동생 갖고 싶었는데 니가 내 동생 하면 되겠네. “
이진이는 애경이에게 왜 그렇게 탁구를 열심히 하냐고 물을 필요가 없어졌다. 애경이는 진심으로 탁구를 좋아하는 거 같다. 어두워서 더 반짝이는 별처럼, 애경이의 힘들었던 하루는 그래서 더 탁구가 좋다는 것처럼 빛이 나 보였다.
작은 애경이는 어느 돌보다 단단한 보석처럼 빛나는 어른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