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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이 Nov 26. 2023

나도 벤츠에서 울고 싶다.

첫눈 오던 날

비가 오려나 날씨가 몹시 꾸물하다.

몇 년 전에 수술한 무릎이 쑤시는 것이 오늘은 뭐라도 내릴 날씨다.


휴지가 똑 떨어졌다.

강쥐 네 마리가 싸대니 휴지와 물티슈가 금세 동이 난다.

때마침 고기도 떨어졌으니, 코스트코를 가야겠다.

아드님과 강쥐들의 선호식품인 고기, 고기, 오직 고기는 그나마 코스트코에서 대량으로 구매해야 넉넉히 먹일 수가 있다.

집 앞 농협에서는 날씬한 고기 한팩이 삼만 원이라 아들들이 씹다가 이빨 사이에 끼다 말 것 같은 양과 삼겹살이 삼만 원이라는 부담감에, 답은 코스트코이다.

지난번 코스트코에서 같이 간 친구가 내 카트기에 담긴 각종 냉동, 냉장, 국산, 수입산류의 고기들을 보고는 하는 말이 축구 선수 동계훈련 합숙소냐며 놀려댔었다.

고기도 고기지만 먼지 안 날리고 흡수력도 짱짱한 두루마리 휴지를 사러 빨리 가야겠다.




뚱마와 함께 이십만을 달린 흰둥이를 몰고 길을 나선다.

송도의 코스트코를 가기 위해 인천대교에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펑펑 퍼부어대기 시작한다.

첫눈을 인천대교 위에서 맞다니, 그것도 11월에 말이다. 오십에도 예상치 못한 첫 경험이 많구나 싶다.


당황한 건 뚱마뿐만이 아니었다.

11월의 폭설에 차들은 모두 비상등을 켜고, 바다 위 길고 높은 다리 위를 엉큼엉큼 기어가기 시작했다.

초보운전 스티커가 붙어있는 엑센트 차 한 대가 혼자 핸들을 꺾은 채 위태롭게 멈춰 있었다.

초보가 고가 다리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핸들이 꺾였을 때의 어마무시한 공포감이란, 그것도 바다 위라는 것은 감히 상상이 어려웠다.

백미러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그 초보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다리 위에서 첫눈을 맞으며 위태롭게 기어가자니 후회가 밀려왔다.

쑤신 무릎이 하늘에서 뭔가가 쏟아져 내릴 거라고, 그리도 예보를 해 줬건만, 굳이 이런 날 휴지 사러 인천대교를 건너려 했는지, 바다 위 긴 다리 위에서 첫눈을 맞으며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다리 위에는 왜 유턴차선이 없는지, 빽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어기어 무사히 도착한 코스트코에는 금요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댔다.

눈길 운전의 스트레스를 잊고 쇼핑에 집중해야 한다.

길게 쉼 호흡을 하며 카트기를 민다. 생각 없이 사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오십만 원이 넘으니, 정신을 똑띠 차리고  목표한 것들만 담아야 한다.

고기 코너를 가기 전에 보이는 케이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치즈케이크랑 눈 마주치면 큰일 난다.


소고기는 미국산으로 큼지막한 덩어리를 담는다.

삼겹살은 국산 수육용과 미국산 슬라이스로 두 팩 담는다.

닭은 볶음용 2팩, 백숙용 2팩을 담는다.

양념 불고기 1팩, 오븐에 구워진 통닭 한 마리를 사고 냉동 코너 쪽으로 가는 길에 와인을 살짝 시음한다.

뚱마가 사랑하는 다크 드라이 한 맛이 맘에 쏙 든다. 가격도 삼만 원이 되지 않는 것이 살짝 흔들렸지만, 담지 않는다. 그리고 계획한 너겟, 너비아니, 피자, 만두, 피자치즈 그리고,,, 그만 담자

마지막으로 휴지와 강쥐들의 개껌과 간식도 담는다. 계란이 만오천 원을 넘기다니, 그래도 담아야 하는 품목이라 담는다.


결국 오십만 원 가까이 지불을 한다. 그나마 뚱마의 사랑인 치즈케이크와 와인을 담지 않은 것에 스스로 칭찬하며 흰둥이에 가득 실는다. 당분간 고기 걱정 안 해도 되니 안심이다.



거리에는 펑펑 부어댔던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고, 촉촉하게 젖어 있다.

내가 헛것을 경험한 건가 싶을 정도로 나뭇가지 위에 눈조차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아마 때 이른 눈이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떠났나 보다.


네비의 목적지를 벤츠 전시장으로 바꾼다. 10분 거리이다.

갱년기라 그런가,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오늘 날씨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벤츠 전시장에 가서 클래식한 스타일의 나의 원픽 E클래스를 진~짜 구경만 하고 싶어졌다.


" 어서 오세요 고객님, 상담 신청하셨나요?"


"아니요, 그냥 구경만 하러 왔습니다."

" 네, 둘러보시고 상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내가 갖고 싶은 차 E 클래스 익스클루시브가 있다. 안을 구경하고 싶다.

날 노린 상담원 한 명이 다가온다.


"고객님, 타 보셔도 됩니다. 전시되어 있는 차들 다 앉아보셔도 됩니다."


그의 친절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차는 필요 없고 나의 원픽 흰둥이 E의 운전석에 앉아본다.

촥 감긴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안아준다.

벌어도 벌어도 깨진 장독 같은 나의 재정상태와, 그럼에도 새끼들 조금 더 먹이려고 사랑하는 치즈케이크와 와인을 담지 못했던 서글픔에 위로를 준다. 확 시동을 걸어버리고 싶다.

이건 마치 내 것 같다. 갖고 싶다. 지르고 싶다.

누가 삼천만 땡겨주면 탈 수 있는데, 난 누구도 없으니 막연하게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추리닝 차림으로 빈티 나는 나에게서 무엇을 캐치했는지 상담원이 그냥 상담만 받아보라며 아메리카노 한잔을 권해준다.

종이컵에 박혀 있는 벤츠 로고에 또다시 심쿵한다.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아는 건지, 마트패션 차림의 아줌마에게 상담원은 판매전략을 펼치려 한다.


" 아니에요, 저는 자금여유가 없어서 지금 살 수가 없어요. 그냥 요즘 엄청 할인을 해 준다고 광고가 많길래 호기심에 와 봤어요. 괜히 저한테 시간낭비 안 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말한다.


"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사시면 되죠. 여기까지 오셨다는 것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니까 오셨겠죠. 일단 앉으시죠."

E 종류는 3가지인데 할인은 대략 얼마이고.... 하면서 판매전략을 펼치는 상담원의 말에 집중을 못하는 뚱마를 보고 다른 말로 유혹한다.


" 며칠 전에 계약한 고객님이 있었는데요. 화장품 판매원을 하시는 분이셨어요. 코로나 때 방문 판매가 너무 힘들어서 차 안에서 매일 울었대요. 그러다가 울더라도 벤츠 안에서 울고 싶어 졌대요. 코로나 지나고 다행히 방문 판매가 잘 되면서 다 필요 없고 벤츠 먼저 구매하러 오셨대요."

ㅠ.ㅠ


' 아! 나도 울고 싶을 때, 벤츠 안에서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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