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Neckerauwiese를 다녀왔습니다
요 며칠 몸이 으스스해지더니, 별 일도 없었는데 감기 몸살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비를 맞거나, 갑작스레 체력을 쓰지도 않았고, 밥도 잘 먹고 심지어 운동도 다녔는데 말이다. 익숙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건강관리인 가보다.
며칠 약을 먹고 집에서 땀을 흘리다 문득 화창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봄이 오고 있었다.
20대 때 봄만 되면 벚꽃엔딩이 어디선가 들려오고, 따스해진 햇살과 봄바람을 만끽하며 꽃구경을 떠나곤 했다. 가족들과도, 친구들과도, 애인과도. 벚꽃은 다른 사람들처럼 내겐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독일엔 벚꽃이 없는 줄 알았다. 끽해봐야 겹벚꽃이 옹기종기 보인 본(Bonn)의 한 거리가 한국인들에게 얼떨결에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내 추억 속 벚꽃은 빨간 겹벚꽃이 아니라, 하얀 왕벚꽃이다.
잔디가 점점 초록을 띄면서 올라왔다. 모처럼의 햇빛을 쬐며 걷다 보니 길가에 벚꽃이 핀 나무가 있었다. 세상에! 이게 벚꽃 나무였어? 얼마나 반갑던지. 한국의 느낌을 조금 느낀 것 같았다. 아직 초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무는 하얗게 토실토실 뭉쳐있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문득 떠나고 싶었다.
사람이 떠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너무 힘들어서 도피를 하고 싶어서, 너무 단조로운 일상 때문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그냥 이유 없이 새로움을 불어넣고자.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나는 학기 중반이 되면서 급격하게 공부의 양이 줄어들고 있었다. 앉아서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실제 읽은 논문이나 내가 받아들인 지식의 양은 줄어든 것 같았다. 이런 생각과 계산이 은근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종국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채찍질을 하게 만든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람은 기계 아니어서 적당한 휴식과 동기부여 및 자극이 필요하다. 몸은 무겁지, 마음은 더 무거워지지 무언가 바람을 넣고 싶었다. 어디로 가고 싶다는 즉흥적인 생각과 함께 일전에 여행하면서 본 하이델베르크의 푸른 잔디밭이 떠올랐다. 홀로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고 성을 구경하다 내려다본 강가 옆 넓은 잔디밭엔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누워 햇빛을 즐기며 책을 읽거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유럽이라면 그런 여유가 진미 아닐까?
그렇게 책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
역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다 발견한 벚꽃나무. 핑크빛 벚꽃나무가 곧 만개할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멋진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 책일 읽고 있었다. 오늘 나는 저 사람처럼 잔디밭에서 책을 읽을 것이다. 유럽의 낭만을 가득 담아.
정말 한국에 있는 나무와 같아 신기했다. 난 유럽엔 우리와 같은 벚꽃나무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겹벚꽃만 알고 있다 하여 나도 그대로 선입견을 가져버렸다. 우리는 이토록 쉽게 생각에 휩쓸린다.
Neckarauwiese에 있는 두 그루의 벚꽃나무를 찍어보았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 놀고 있었다. 가지가 우거진 벚꽃나무의 꽃송이들은 마치 알사탕? 솜사탕 같은 정겨움을 선사한다. 난 그런 귀여움이 좋다.
푸르고 맑아 좋았다. 익숙함에 찌들어 있던 내 마음에 새로움이 들어왔다. 저 솜뭉치에 코를 가져다 대고 싶어 진다.
더 많은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꽃도 뭉칠 때 더욱 이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홀로만 잘해봐야 의미가 없다.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강이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오래된 성과 건물들이 많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다. 멀리 있지 않은데 두 학기 중 겨우 오늘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공부라는 때깔 좋은 변명으로?
몸이 으슬으슬 떨려 옷을 얇지 않게 입고 왔다. 태양이 이글이글거리며 내리쬐고 있었다.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겉옷은 물론 양말까지도 벗고 태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소심하게 양말만 벗고 팔을 걷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해방감을 나는 필요로 한다.
유발 하라리의 책이 마침 왔다. 공부와 상관없는 나만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이토록 행복할 줄이야. 부족한 시간 탓에 독서를 멀리 했는데, 작심하고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으니 무언가 독일에 온 실감이 났다. 집에서 과일을 조금 싸왔다. 자두와 포도가 무척 달았다. 유발 하라리의 메시지는 한결같다. 30년 후에는 생명공학기술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간에겐 새로운 국면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 내가 중년이 되었을 때라는 것인데, 과연 어떨까. 상상은 안됐지만 생각은 해보았다.
꽤나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고, 주로 젊은 대학생들과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았다. 강가에는 바비큐를 하거나 술에 취해 춤사위를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니 급속도로 사람들이 밀려왔다. 오전에 일찍 오길 잘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조용하게 지낼 수 있었다.
쨍쨍하지만 아직 바람은 차가웠다.
한국에도 한강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여흥을 즐긴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사진도 찍고 추억도 만들고. 나도 그랬다. 스터디원들과 새벽에 한강에 가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던 때가 문득 그리웠다. 나는 그들과 단지 놀았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리워한다.
영국과 독일 강가에서 관찰해보니 기러기? 거위? 들이 많았다. 이곳엔 거위라고 쓰여 있었다. 요놈들 참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말이야.
안내문이 있었다.
Wiese로 내려가기 전 강 다리 위에서 찍었다. 푸르고 넓다. 내가 사는 곳에는 이렇게 넓은 곳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갑갑한 생각이 가끔은 든다.
독일은 참 자전거 도로가 잘 돼있다.
강 반대편에서 진입하며 찍어보았다. 빨간 지붕과 높지 않은 옛 건물들. 바로 유럽의 표본이 아닐까.
2시간 정도 지나니, 사람들이 몰려왔다. 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대학생들이 모여 음악을 시끄럽게 틀었다. 신기한 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내가 관찰한 독일인들은 보통은 알면서도 티를 잘 내지 않는다. 나는 음악소리에 피로감을 느껴 자리를 뜨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학을 하다 보면 익숙함이 싫으면서도 계속 바라게 된다. 싫다는 것은 심심하다는 것이고, 바란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것이다. 머리가 늘 복잡하니 생각을 덜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나서게 되면 그만큼 보상이 주어진다. 좀 쉬어도 되겠습니까. 열심히 했든 안 했든. 유학을 와있는 것만으로도 피로도는 항상 중간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