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주거 공간과 그곳에서 나와 함께 지낼 나만의 여자, 그리고 어쩌면 나만의 아이까지도. 이런 걸 바라는 게 유별난 건 아니지.”
프랑스의 작가 보부아르와 결혼할 ‘뻔’ 했던 남자 올그런의 말이다. 데버라 리비는 <살림 비용>에서 이 말에 대하여 일시적 동조를 표한다. “그래, 그런 좋은 것들은 하나도 유별나지 않다”라고 말하며 말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데버라는 이를 뒤엎는다. 다만 보부아르가 치러야할 대가가 올그런이 치러야할 대가보다 크다는 걸 보부아르는 알았다고 말하며, 글을 쓰는 여성이었던 두 사람, 글을 쓰면서 행복과 사랑과 가정과 아이도 가질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요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보부아르는 글을 쓰면서 행복, 사랑, 가정과 아이를 모두 가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역사적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데버라도 그게 얼마나 호락호락 하지 않은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 대목이 나를 스치지 않고 관통해서 지나간 이유는 아마도 어제의 대화때문일 것이다. 점심시간에 만난 J언니는 멀리 독일에 떨어져 지내는 남편과 최근 언쟁이 있었다고 했다. 연구원인 남편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근무지를 옮겨 연구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J언니 역시 대학원과 직장생활을 병행할만큼 자기 분야에 열정적인 여성이다. 두 사람이 두 줄로 걷던 길을 결혼이라는 매듭을 시작으로 한 줄로 걸으려면 조율과 양보 그리고 희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 줄을 완전히 걷어낼 필요까진 없을지 모르지만, 한 줄을 조금 조정하고 메이는 방식으로 두 줄은 한 줄이 되어간다. 남편의 연구활동을 위해 언니는 기꺼이 퇴사를 하고 유럽행에 동참했고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남편이 다음 연구활동을 이어갈 곳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귀국’이라는 카드가 등장한 것이다. 어차피 귀국할 것이라면 굳이 퇴사하지 않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자신의 한 줄이 생각났다. 바로 그 지점에서 약간의 언쟁이 생긴 것이었다.
몇 주전의 일이 생각났다. 프랑스 여행경비를 정리하던 노트 귀퉁이에 적혀 있던 예비남편의 혼잣말을 발견했다. ‘박사 디펜스, 연구활동’ 대수롭지 않게 넘겨보려 했던 그 단어들은 바로 며칠 뒤 모 대학의 팜플렛을 보고 있던 남자친구를 발견한 순간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나는 남자친구에게 비장하게 걸어가 말했다.
“혹시 교수 코스 할거야? 그럼 미리 말해야 해. 포항으로 가버리면 나는 임신 못해.”
이 작은 헤프닝은 여러 가지를 시사했다. 나는 오롯이 혼자서 이 결혼과 출산과 양육의 문제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는 안정적인 심리 하에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정’이라고 여겼던 것에서 오차가 발생하자 나는 출산과 양육 모두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어졌다. <오리지널스>에서 애덤그랜트는 성공한 유명인사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누구보다 안정적인 환경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한 바 있다. 완전히 합치되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나 역시 안정된 관계와 환경에 있을 때 비로소 출산과 양육이라는 도전에 용기가 생겼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J언니도, 나도 배우자를 응원한다. 배우자의 꿈을 응원한다. 가능하다면 그 꿈을 지켜 이뤄내길 바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꿈은?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는 여러 역할을 수행하고 때로는 동시에 이 역할들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여자, 아내, 직장인, 딸, 며느리 그리고 엄마. 과연 이 역할들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애초에 이 역할들을 동시에 수행하긴 어려우니 말이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 역할들 중 어떤 역할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가. 어떤 것을 열심히 하고, 어떤 것을 적당히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두 줄을 한 줄로 엮는 것에 대하여 서로의 남편들과 마음의 충분한 합치가 이루어졌는가. 마지막 문장을 적어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건, 아마도 확신의 결여와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