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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18. 2019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프랑수아즈 사강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민음사


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p9)


소설의 첫 시작은 거울을 보고 있는 주인공 폴(女)의 모습니다.

좌절로 얼룩진 얼굴을 자신의 나이인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보는 폴은 '홀로' 고독의 형벌을 짊어진 연애를 하고 있다.

폴에게 고독은 형벌이 맞다.

오래되고 현실적인 연인 로제(男)가 폴과 함께 춤을 추는 가벼운 데이트 이후에 (함께 자지 않고) 폴을 '홀로' 내버려둔 채  가벼운 마음으로 '홀로' 걷는 선택을 할 때조차도 폴은 그 '홀로'에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로제가 당당히 '홀로' 걸을 자유를 누리기 위해 외면하는 폴의 긴 긴 밤 외로움은 이 정상적인 연애가 흘리는 부당한 눈물이다.

로제가 '홀로'한 그 선택 이후의 뻔한 '바람'과 병적으로 외쳐대는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매력적인 연하남의 불장난에 응하기로 마음 먹은 폴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자 '상대를 자신만큼 소중히 여기는 건 폴과 나의 경우지.'라고 포장하는 실력까지.. 이 연애의 부당함에서 왠지 모를 익숙한 냄새가 나는 듯 하다.

그래서 일까..

자신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때론 사랑을 만끽하느라 일하러 가지도 않고

편견 찌든 늙은 여우들에게 새끼 목도리 도마뱀처럼 권위를 세울 줄도 아는

14살 연하의 청년의 열렬한 사랑에도

우리의 폴은

(폴의 묘사에 따르면) 지루한 연인 사이에 '무엇인가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만두지도 못했던 사랑의 관성을 이어간다.

폴이 시몽과 헤어지며 그녀 자신도 모르게 덧붙인 말은 이것이었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p150)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관통하는 정서는 폴의 늙음이다.

거울 속의 늙은 자신과 마주하고

나이답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의, 또는 자신 안의 눈초리와 마주하고

연인 사이의 무엇인가 죽어버려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늙어버린 연애와  마주하고

그 모든 선택의 변명도 '늙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브람스를 좋아하냐고 묻는 게 왜 중요할까?


사강이 그렇게나 강조했다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뒤의 말줄임표는 뭘 말하는 걸까?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p56)


어느 일요일 폴은 시몽의 편지를 받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시몽의 귀여운 질문에 폴은 미소를 지었고, 브람스의 콘체르토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까지 듣지 못하고 중간에 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녀의 집중력이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흔적, 즉 자아를 잃어버린 것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은 그녀에게

그녀가 잊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거대한 망각덩어리를 불러 일으켰다.


그 망각덩어리가 무엇일까.

자아, 자신의 흔적, 순수한 열정, 더 이상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초심, 경이로움, 그 이외에도 시몽으로 대변되는 천진난만함들....


어쩌면 '브람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묻는 그 질문을 우리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줄임표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 질문이 숨기고 있는 단호한 명령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듣다보면 듣는 중이었다는 것을 쉬이 잊어버리게되는 브람스 음악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특히 늙어감에 따라, 쉽게 잊혀져가는 그 '덩어리'들을 기억해내라는 단호한 명령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모든 상실을 무릅쓰고 우리가 기어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시몽이 말하는 '인간으로서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 고독형을 선고합니다.(p44)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브람스'는 아주 짧은 순간 지나가지만 그 순간을 고작 몇 페이지의 소재거리 정도로 치부한다면 이 소설의 전체적인 뉘앙스가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 독서모임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드라마를 보고 수다를 떨듯

답답한 삼각관계 속 폴과 로제 시몽을 신랄하게 비난하다가......

잠시 멈추어 다함께 '브람스'의 음악을 들어보기로 했다.

과격할 것만 같았던 태풍이 연주한 빗소리, 파도소리는 운치있었고

그 소리를 내치지 않고 부드럽게 울려퍼지는 브람스의 음악은 심장을 간질이는 듯 했다.


이제 조금 알겠다.

폴이 잊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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