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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20. 2019

'니나신드롬'을 아시나요?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니나 신드롬: 1950년 독일에서 '삶의 한가운데'라는 소설이 출간된 후 그 주인공 니나의 자유로운 삶을 선망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현상


*감상평 읽기 전 더 깊은 이해를 위하여

  (감상평은 역사적 배경 뒤에 나옵니다.)


   [주요 등장인물] 주요 등장 인물은 3명이다. 주인공인 니나 부슈만,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 니나를 사랑했던 슈타인 박사.

니나 부슈만은 자유와 죽음을 동경하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며 반나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교도소에 수용되기도 하는, 순응과 영적 자립 사이에 갈등하며 성장하는 내적 힘이 강한 여성이다.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는 니나의 12살 손위 언니로 결혼 후 니나와 소원하게 지내다 니나의 요청으로 니나의 생일에 니나에게 방문하게 되었다. 남편과 단둘이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하는 인물이지만 니나와 슈타인 박사의 일기를 읽으며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목소리와 마주하게 된다.

슈타인 박사는 자기보다 20살 어린 니나를 사랑하여 18년 동안 니나의 인생을 관찰하는 일기를 남긴 비운의 인물이다. 스켈가에서 개업의사였다가 훗날 교수가 되어 안정적이고 통제된 삶을 살아간다. 여동생 헬레네와 평생 함께 살았으며, 니나가 반나치 운동을 전개할 때 슈타인은 니나와 주변 사람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나치당에 가입하기도 한다. 1947년, 진정으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느끼며 생을 마감한다.


  [역사적 배경] 소설 속 배경은 20세기 초중반 독일이며, 슈타인의 일기는 1929년 세계대공황에서 부터 1933년 히틀러의 총리 임명으로 나치당이 득세하고 1939-1945년 세계 제2차대전이 일어난 후 1947년 까지 쓰여졌다. 반유대인정책과 사회적 약자 말살 정책, 인종차별주의가 당연하게 행해졌던 시기이자  전쟁의 패배로 이 모든 확신이 무너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가 나의 감상평


   니나의 38살 생일에 도착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의 연락이 끊겼던 니나의 12살 손위 언니 마르그레트, 그리고 슈타인 박사가 죽기 전 니나에게 보낸 18년간의 일기와 편지. 니나는 지치고 슬퍼 보였고 유부남인 사랑하는 남자를 떠날 계획이었다. 니나는 언니에게 자신이 떠나는 이유를 알리고 싶어 언니를 불러 들였다고 말한다. 언니는 슈타인의 일기와 편지를 읽어 나가며 니나와 대화하고 니나에 대해 알아간다.


  슈타인 박사가 니나를 처음 만난 것은 1929년 9월 8일. 니나가 18살 때였다. 니나는 패혈증에 걸린 환자였고 슈타인 박사는 병색에 지친 니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니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벌써부터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고 죽음을 동경하고 있었다. 정신적 자유를 갈망했고, 훗날 이러한 갈급함이 자신과 주변사람을 끊임없이 극단으로 몰아세우게 된다. 니나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악과 예절은 크게 의미가 없었으며 오로지 죽음과 무한, 자유를 향한 정신적 역동성만이 니나의 우울한 눈빛 아래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슈타인 박사는 이러한 니나의 야생성에 치명적인 끌림을 느낀다. 니나의 육신이 자신의 곁에 있기를 원하고, 니나의 정신이 자신에게 스스로 걸어오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것은 슈타인이 평생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니나는 슈타인이 정신적으로 자신을 자극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슈타인과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지만, 니나의 자유로운 정신이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슈타인의 유보적 태도에 니나는 다시 떠난다. 슈타인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니나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지  못했고, 죽기 직전에도 니나는 이것을 탓하지만 슈타인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왜 당신은 <할 수 있었다> <이었다> <하려고 했다>라고 말하는 거죠? <할 수 있다> <이다> <하려고 한다>라고 하지 않고?
p369 (1947년 9월 7~8일 일기)


  니나는 언니에게 슈타인이 정복욕으로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슈타인은 죽기 전에서야 자신의 결단을 기다렸던 니나의 요구를 물리쳤던 이유가 속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깨닫는다.                                                      

니나를 얻기 위한 투쟁은 한 특별한 여성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방향으로 나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고 발전시키려는 투쟁뿐이었다.
p339 (1947년 5월 5일 일기)


 슈타인은 죽기 전 18년 간의 사랑과 함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니나에게 용서를 구한다. 슈타인은 자신의 죄가 '자신의 유약함으로 인해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은 뒤에 생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오. 내가 지은 죄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오. 나는 그것이 비겁했기 때문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아마 유약했기 때문일 것이오......... 진정으로 삶을 살지 못했을 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잘 있으오, 잘 있으시오.
p34-35 (1947년 9월 8일 슈타인이 니나에게 쓴 편지)


  그렇다면 언뜻 방만하게만 보이는 니나의 삶, 뚜렷한 선악 개념이 없이 누군가의 절실함으로 성관계를 맺기도 하고, 폐렴으로 죽음의 공포와 고독에 시달리는 성직자의 역겨운 키스를 참아주기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남자와 만나며 사랑과 정치적 신념을 두루 실현하는 그런 삶 속에서는 어떤 결단이 있는 것일까. 


이는 니나의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한번은 내가 죽는 꿈을 꾸었어요. 그것은 끔직한 공포로 가득 찬 순간이었어요. 마치 목이 졸리고 찢기고 부서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었을 뿐, 그 다음에 온 것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어요.나는 아주 가벼워졌고 날아다녔어요. 내 몸은 수정같이 보이는, 그러나 수정은 아니었고, 딱딱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아주 가볍고 밝은 물질로 되어 있었어요. 나는 점점 가벼워지고 밝아져서, 마침내 은색 공기로 만들어진 공 같은 것이 되었어요. 아주 황홀했어요.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나는 깨어났어요. 잠에서 깨어난 그날 아침 나는 끔찍이 불행했어요. 나는 벽과 바닥과 천장이 있는 방에 나무와 새털로 만들어진 침대, 내 침대에 누워있었어요. 이미 무한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을 때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힘들게 일으켜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하는 육체 말이에요.한계를 가진 이런 육체적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나요? 그것과는 다른 것이 있는데, 우리가 동경하는 그런 자유가 있는데도 말이에요..... 나는 죽고 싶은 거예요. 이해 못하시겠어요? 사는 것 보다,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p45-46, (1929년 9월 20일 슈타인의 일기)


  니나는 죽음을 통해 무한을 체험하고 물질적 삶의 한계를 인식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으로 우울을 느끼고 있다. 니나는 진정한 우울의 눈에는 활기, 집중, 분주함 같은 것들이 무대의 막처럼, 희망도 없고 분노도 없는 삶의 허무함을 숨기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니나는 죽음의 인식으로 삶의 역동성에 자신을 내던져 '완전하게 사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 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p77-79                                                      
나는 자유롭게 있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 속에 수백 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느껴요. 모든 것은 나에게 아직 미정이고 시작에 불구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신을 어떤 것에다 고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p127 (1933년 1월 23일 니나의 편지)       
니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지 꽉 붙잡고 있으려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집시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삶은 잠정적이었다. 한군데에 천막을 치고 한동안 살면서 정성을 쏟다가 그곳에 대해 알 듯하면 망설임 없이 천막을 거두고 그곳을 떠난다. 그녀의 얼굴에는 야생적 자유에 대한 행복감과 고향 없는 사람의 슬픔이 한께 있었다. 깊이 잠든 얼굴에도 이것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니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완전하게 사는 삶! 나는 이것을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계속 생각했다.
p134-135


  하지만 완전하게 사는 삶이라 해도 니나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니나는 끊임 없이 고행으로 자신을 내몰고 있다. 니나는 왜 인간이 고통속에서만 지혜를 찾을 수 있는지 자문하지만, 고통 속에서 삶과 마주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철저히 자신을 극단으로 내몰아 자신만의 결단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 앞에 한낱 껍데기일 뿐인  삶의 지혜로 향하고 있다. 그 지혜의 끝에는 니나가 이루고자 하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 니나에게 자유는 허망한 육신의 안락함을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의 자유이다.                                              

니나는 성난 듯 말했다. 한번 어떤 일을 감행하고자 하면 누구나 용기를 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이번에는 내가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누구나 다 무언가를 감행할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은걸.
그러나 나는 니나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니나의 본질에 있는 어떤 딱딱함 같은 것이 천성적으로 유약한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믿을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나는 자기 자신에게 극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리라. 나는 니나와 함께 사는게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니나와 함께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걸 감지했다.
p154-155
거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니, 기도하는 거니?니나는 나를 아주 조용히 바라보더니 바로 지금처럼 금방 얼굴의 광채를 거두었다. 참견하지마. 니나는 말했다. 나는 이걸 할 수 있어야만 해. 무얼 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니? 나는 물었다. 모든 것,그녀는 말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언제든 따뜻한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 가시나무를 손으로 잡는 것, 사나운 개한테 가는 것, 매질을 견디고 소금을 먹는 일 등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해.
p156


  슈타인은 니나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것을 느꼈다. 슈타인은 니나의 육체를 사랑했고, 그만큼 정신도 사랑했기에 니나를 가질 수 없었다. 슈타인은 일관적이고 통제하는 삶 속에서 경험의 극단과 자신이 내려야 할 결단을 피해왔다. 하지만 니나에게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강인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니나는 안정적이었던 슈타인의 삶에 피어나는 균열로 '결단의 부재'를 알아차리게 했고, 슈타인은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은 삶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늘 그 언저리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니나만 슈타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니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늘 슈타인이 있었다. (이것이 니나가 슈타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세속적인 의심을 품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슈타인은 니나에게 가득차있던 죽음에 대한 역동을 삶을 향한 역동으로 바꾸어 놓는다. 니나가 18살 때에도, 니나가 결혼해 둘째를 임신한 채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도 니나를 살린 것은 슈타인이었다. 니나는 슈타인으로 인해 자신 속의 에너지를 삶의 한가운데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결국 니나와 슈타인의 이야기는 단지 어린 여자에게 놀아나는 늙은이의 이야기가 아닌, 방탕한 여자에게 휘둘리는 늙은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 서로를 자극하고 스스로를 알아가며 진정한 삶을 실현해가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불편합니다. 당신은 내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나를 몰아갑니다. 당신은 나를 수줍은 소녀로 만들고, 어떤 때는 성숙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을 기대합니다. 나는 그중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127 (1933년 1월 23일 니나의 편지)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니나와 슈타인이 아닌 니나의 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거나,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니나는 언니에게 묻는다. ‘행복했어?’ ‘언니는 사랑이 뭔지 알아?’ ‘그러면 사랑과 정열의 차이는 뭐지?’  38살이나 먹고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니나의 모습에 실소가 터진다. 니나의 언니도 이 질문에 진지하게 고뇌하기 보다는 니나에게 훈계한다.                 

니나, 나는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이제 마흔아홉 살이야. 오십이 다 된 여자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해야 해. 그러나 다 지나간 일이야. 대개 적어도 이 나이면 지나갔다는 것이 기쁠 뿐이야. 나같은 사람들은 지나간 것들을 눈물, 히스테리, 갈등,화해, 끝없는 오해, 몇 번의 아름다운 밤, 오랜 기다림 등이 서로 막 뒤섞여 있는 것으로 추억하지.
p36


  모든 것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삶.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이 생동적인 모험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임에 안심하는 삶.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이자, 미래의 그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는 단순하고 습관적인 삶. 모든 것을 겪어봤기에 어느 것도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은, 그렇기에 첫경험과는 달리 매우 빠르게 흘러가는 삶. 그것이 대부분의 우리 살고 있는 삶이 아닐까?


이 책은 나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삶의 덧없음으로 인한 삶의 역동성과 가능성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삶을 실천하고 있는가?

당신은 삶의 한 가운데서 살고 있는가?


니나를 이해하고, 니나를 사랑하게 된 자라면

오늘 부터라도 안락함의 환상을 버리고 삶이 내모는 결단에 몸을 던질 것이다.  




* 작품 : 삶의 한가운데 (독일, 1950년)


* 작가 : 루이제 린저 (독일, 1911~2002)

뮌헨대학교 교육학, 심리학 전공, 1935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39년 학교로부터 나치스에 가입하라는 압박을 받고 퇴직, 1940년 처녀작 ‘파문(유리반지)’, 1944년 히틀러 정권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작품의 출판금지를 당하고 감시받다가 반나치스활동으로 투옥, 1944년 10월 사형선고, 1945년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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