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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Nov 03. 2019

82년생 김지영을 보는 틀린 방식

'82년생 김지영' '다른 게 아니라 틀린겁니다'


<두 권을 함께 읽으면 좋은 이유>


 이번에 독서모임을 계기로 조남주 작가님의 '82년생 김지영'와 위근우 작가님의 '다른 게 아니라 틀린겁니다'를 함께 읽게 되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것은 작년 쯤이었는데, 이번에 두 책을 함께 읽으면서 페미니즘을 향한 이해의 문이 비로소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늦었지만, 비로소 나는 페미니스트가 된 듯 하다.


두 책을 함께 읽었던 것이 좋았던 이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원체 유행에 늦는 편이라 작년에 '82년생 김지영'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읽었을 때 느낌은, '아! 나도 저랬는데' '오오 이런 통계가 있었네, 나도 그랬는데' 이런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것이 억울하다거나 공격적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혹시나 조남주 작가님의 문체에 조금이라도 분노의 날이 서려 있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과했다면 나도 글을 읽는 내내 불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화가날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김지영씨보다는 조금 어리긴 하지만 김지영씨과 거의 같은 경험을 별 자각없이 매일 겪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책을 읽었다고 했을 때 청년이라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있고 장년이라 하기에는 젊은 한 남성이 '절대 그런 나쁜 책은 읽어서는 안된다. 피해의식에 가득찬 소설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때 마치 80년대 금서였던 마르크스 책이나 '페다고지'를 읽다가 들킨 사람 같이 왠지 모를 불안감, 죄책감, 괴리감, 고립감이 밀려 들었다.  그 순간 귀에 이명이 들리듯 심장에 강한 신호음이 울려 댔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받아 들였던 일'들이 그들에게는 '피해의식을 느낄만한 일'로 비춰졌구나 하는 위험신호였다. 그 사람에게 말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제가 겪었던 일이라 공감을 많이 했었는데.. 피해 받았거나,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게 억압인가봐요."


그 남성은 당황한 기색을 비췄다.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타인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의리 있고 멋진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을 아주 좋아하지만 마냥 좋기만한 사람은 아니라서 때로는 쓴소리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82년생 김지영' 책을 빌려 주었다. 그는 아마 그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그저 그 이상한 기분을 간직한 채로 그때부터 보이는 '82년생 김지영' 이슈들을 답답한 마음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팬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던 여자 아이돌이나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지도 않고 평점 테러를 가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며 답답하지만 그것을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이상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무지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무지를 알기 쉬운 언어로 깨준 것이 위근우 작가님의 책이었다. 내가 평소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것이 왜 불편한지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수많은 일들이 위근우 작가님의 활자로 인해 숨을 쉬게 되었다. 위근우 작가님은 자신이 기자생활을 하며 쌓아온 시대적 관심과 깊은 지식으로 우리가 쉽게 접하는 대중문화, 예를 들면 TV프로그램이나 웹툰 같은 것들을 해석해주는 도슨트 역할을 해 주신다.


위근우 작가님의 글에 따르면, 내가 아마 그 남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동안 인터넷을 중심으로 화력을 쌓은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어떤 반동으로서의 안티 페미니즘과 여성혐오가 있었다면, 그것은 없던 여혐이 생겨난 게 아니라 괄호 안의 불의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이러한 괄호 안의 불의가 드러날 때 그동안 선량한 남성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던 이들이 얼마나 구조적이고 습속적으로 여성혐오를 방관하고 키워왔는지 드러나며 비로소 우리는 빙산의 밑 부분을 이루는 거대한 불의를 목격할 수 있다. (다른 게 아니라 틀린겁니다, 26p)
무지 자체는 죄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지가 무언가에 대해 몰라도 되는 입장에서 유래한다면 이는 권력의 문제이며, 이 권력이 뿌리 기은 구조적 불평등 위에서 작동한다면 윤리의 문제가 된다. (45p)
말로 그런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발언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민감함이 아니라 그 불편함을 근거로 누군가를 문자 그대로 침묵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권력이란 점이다. (50p)


'82년생 김지영'을 읽어 보지도 않고 악의적인 비난과 악플을 쏟아내는 사람은, 여성의 현실에 대한 무지함을 지키기 위해 소설 속 여성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권력을 발동시킨 것이고, 이는 그들이 평소 일상적으로 행해 왔던 여성혐오를 숨겨 놓은 괄호를 벗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 소설로 인해 드러났을 뿐이 었다는 것, 그 균열을 대하는 태도가 사람마다 이리도 다르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촉발한 남녀간의 갈등 구조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위근우 작가님의 책을 읽음으로써 이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작가에 대하여>


조남주 작가님은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인데 <PD수첩> <불만제로> 등 시사교양프로그램의 방송 작가로 10년을 일하셨다고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사회과학적 통계에 기반한 시대적 팩트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 르포(보고기사 또는 기록문학) 소설이다.


위근우 작가님은 기자 출신으로 SNS 상으로 신랄한 대중문화 비평을 많이 하시는데, 그 논리가 예리하고 필력이 대단하여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는 분이다. 이 책도 작가님이 연재한 에세이를 엮은 글이라 읽기 편한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어서 좋다. 하지만 글이 짧다고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첫째로는 작가님의 대중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녹아들어 있어서 배경지식 없이는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기자 출신 답게 문장을 문장구조가 군더더기 없이 논리적이게 풀어내시긴 하셨지만 그 논리를 따라가려면 어느 정도의 문장독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책에 대하여>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에 나온 소설로 구조적으로 짜임새 있고 간결한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문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담담하고 군더더기 없다. 감정적으로는 스스로 숨겨 왔던 괄호 안의 여성혐오가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인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님이 선택한 표본이다. 시대적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선택한 대표성 있는 평범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김지영과 같은 것은 아니다. 대학진학률이 70프로가 넘는다고 해도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며, 대통령 지지율이 50프로라도 나는 다를 수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표본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철저히 통계에 기반한 사실을 구슬처럼 엮어 놓은 것이라 그 시대의 대표성을 띄던 표본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1980년대의 남아선호사상이라던가, 가부장적인 남성의 몸 치장 단속을 받으면서도 1990년대에는 예전과는 달리  공부하는 여자들이 많아진 것,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 여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회사 임원들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을 입사시키고 싶어 하고 설사 여성이 회사에 들어온다 해도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맡기지 않는 2000년대까지. 이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대표적인 시대적 인식'이었을 뿐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구조적 폭력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당하는 폭력과는 달리 그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으로 인한 구조적 폭력은 그 구조 안에서 연속적이고 일상적인 개인의 고독과 고통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주인공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억압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서 이 소설이 공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의 문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된다. '남자는 강해야 해.' '남자는 인생에서 3번만 울어야 해.' '남자는 싸울 줄도 알아야 해.' '남자는 여자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해.' '남자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해.' 이러한 인식들이 남성들의 삶에게도 일상적 고단함을 짊어지게 하지 않는가. 여성의 해방은 남성의 해방과도 직결되는 일이다. 여성의 구조적 폭력을 해결하면서 남성과 평등한 세상을 일구어 간다면 남성들도 무거운 책임감을 벗어들고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위근우 작가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에, 성별·피부색·성적 지향 등 생득적인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인간은 존재하는 그대로 존엄하며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가장 근원적인 한 줌의 도덕이다. 페미니즘마다의 각론과 실천의 방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페미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은 문명인으로서의 전제 조건이다. (18p)


82년생 김지영은 평범하다. 이름 마저도 그렇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학년마다 김지영이 3명씩은 있었다. 지영이라는 이름은 반 마다 2명씩은 있었을 것이다. 시대의 대표상이지만, 그 평범함조차 사치라고 느낄 수 있는 수 많은 청년 세대들에게 가 닿기 어렵기도 한 그러한 평범함. 그녀는 삶에서 이렇다 할 트라우마라던가 드라마틱한 요소는 없다. 무난하고 선한 시민들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2015년 가을 '빙의'를 통해서다. 그 전까지 그녀는 세상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를 떠올렸다. 소설 속 주인공 영혜은 남편의 무난한 삶을 위해 선택되어 대한민국의 주부로서 살고 있는 평범한 여성으로 나온다. 그녀는 어느 날 잔혹한 이미지의 꿈을 꾼 후 평범함의 가면을 쓴 잔인한 인간성의 상징인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그냥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세상의 행동방식을 수동적이고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수준이다. 식물이 되어 버린 사람 처럼 차갑고, 세상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아 계속해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식적인 화합의 이미지'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 그녀는 존재만으로 세상의 위협이었다. 그 소설에서는 영혜의 평범함을 걷어내고 그녀와 평범함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적 장치가 정신병으로 취급되는 '채식', '육식의 거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폭력적으로 그녀에게 고기를 먹으려 하고 영혜는가족들 앞에서 벌인 자해를 한다. 그 날 이후 남편은 자신의 평범함을 흠집낸 영혜를 떠나버린다.  


'82년생 김지영'의 소설적 장치는 빙의였다. 그녀가 빙의될 정도로 고통스러웠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가 빙의되지 않았다면 남편이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했을까 하는 무기력한 의심이 떠오른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그 고통의 강도를 증명하지 못해 침묵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은 이들을 영원한 침묵, 그러니까 죽음 까지도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슬픈 생각도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을 쫓아가면서 보이는 시대적 분위기는 이렇다.  

○ 1982년~1994년 남아선호사상으로 급증한 여아 낙태와 남자형제만 편애하는 집안 분위기, 학교에서도 남자들에게만 반장을 맡기거나 남학생이 당연히 1번부터 번호를 부여받고 여학생을 그 후에 번호를 지정하는 것.

○ 1995년~2000년  생리를 부끄러운 일이라며 숨겨야 하고, 여고에 출몰한 바바리맨을 여학생들이 소탕했다는 이유로 “여자애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교 망신이다, 망신.”이라는 말로 면박주고 근신 처분을 내린 학교,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남학생이 김지영씨를 집 근처까지 쫓아왔고 욕설까지 섞어가며 위협했지만 오히려 아버지에게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고 혼나는 김지영씨, 1999년 남녀차벌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되고 2001년 여성부 출범하는 등 조금씩 변해가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당연하게 대학교까지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여성들.

○ 2001년~2011년 대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중요한 직책은 맡지 못하는 여성들, 남성보다 취업이 어렵고 입사하고 나서도 남자보다 적은 연봉을 받으며 승진이 어려운 여성들,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여성들, 육아 휴직을 사용할 만큼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열 명 중 네 명은 육아휴직 없이 일하고 있는 현실, 가정에서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는 말을 듣는 여성들.

○ 2012년~2015년  결혼하고 나서 자녀계획에 간섭하는 어르신들과 출산으로 경력단절된 여성들, 불법촬영 성폭력으로 일상적 두려움을 마주한 여성들과, 주부의 가사노동은 무시하고 맘충이라며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


아마 다들 들어본 이야기들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겪었던 일을 진한 글씨로 표시해 봤다. 딱 봐도 소설 속 많은 부분이 나의 삶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이 내가 겪은 일인데, 이것을 피해의식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내가 겪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피해의식'이라는 정의로  내가 괜스레 억울함을 주장하여 타인을 가해하려는 의도로 비춰지는 것은 화가나는 일이다. 이 소설이 과연 과한 것일까? 일부 남성들의 주장처럼 이 소설은 여성들의 피해의식으로 인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지나친 공상일 뿐이며 김지영씨가 과하게 예민한 것일까?


위근우 작가님은 이런 과도함에 대한 비난, 즉  평등한 것은 좋지만 우려하는 것은 '과도함'이라는 주장을 허수아비 때리기라고 말한다. 위근우 작가님은 과도한 PC함 ( Political Correctness) 을 풍자하는 인터넷 컨텐츠를 언급하면서 이를 허수아비 때리기라고 묘사하는데, 과도한 PC함 ( Political Correctness)이란 백인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왔더니 엄마 아빠가 오히려 딸에게 '너는 인종차별주의자다. 내 사위가 흑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외쳤다는 실소를 자아내는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  지나치게 옳음에 집착해서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것을 비난하는 개념이다.


이 속임수는 정치적 올바름을 폭력으로 규정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기만적이지만, 무엇보다 한국에 만연한 폭력이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보다는 결여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286p)
칼로리 섭취가 과도하면 위험하다. 이 말을 기아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게 의미가 있는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이 말을 독재 국가에 사는 이들에게 들려 주는게 도움이 될까. 의미론적으로 옳은 말이라 해도 각각의 화용론적인 맥락 안에선 쓸모없거나 더 나아가 자칫 잘못된 구조를 용인해주는 말이 될 수 있다...... 공적 발화란 언제나 의미론이 아닌 화용론의 영역에 있다. (288p)


과도함을 주장하는 것은 / 절대 '옳음'이 과도할 수가 없다는 현실(옳음을 감히 규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제는  옳음을 부족해서 생기는 폐단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침묵을 강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이 선을 넘는다고 말하듯, 권력자의 입장에서 '과하다'고 말만 하면 약자는 그저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다. '메갈리아'를 과도하다고 비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메갈리아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전복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따온 말로, 2015년 메갈리아라는 사이트를 통해 여성이 남성에게 당한 혐오적 발언을 그대로 모방해서 되갚아주는 미러링(mirroring)운동이라고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위근우 작가님은 '나는 페미니스트를 지지하지만 과격한 페미니스트인 메갈리아는 반대한다.'는 남성들의 입장 속에 숨어 있는  '나는 여성들이 자신이 당한 일에 침묵할 때에만 페미니스트를 지지한다.'라는 논리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한다.

좋은 말만 해선 변하지 않는 세상은 모른 척하고 여성들의 과격함만을 문제 삼았다. (45p)


위근우 작가님은 여성의 억압 문제 뿐만이 아니라 동성애에 대해서도 예리한 발언을 이어간다.


동성애를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지만 그것을 공적인 경험 영역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위의 발언은 결국 누군가의 목소리를 공적 차원에서 지우면서 삶의 방식은 인정하자는 기만일 뿐이다. (38p)
성소수자 반대자는 결과적으로 성소수자를 권리 부재의 상태로 규정한다. 그들은 성소수자가 성소수자임을 공적 차원에서 밝히지 말라는 요구를 한다....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조건이다. (191p)


페미니즘을 단순이 여성의 해방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종과 성별, 성적 취향에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길에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옳다'고 믿어졌던 것들의 권력이고,

그들이 버티는 건, 단순히 본인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주장하는 게 옳은 것이 될 수 있던 시대를 살아와서다.(79p)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언제나 지배 계급의 사상에 지나지 않았다”<공상단 선언> 「광고를 비롯한 대중문화 텍스트가 말하는 보편은 남성 입장에서의 보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87p)
여성에 대한 남성의 외모 평가는 단순히 예쁘지 않다고 판단되는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닌,평가 행위 그 자체로서 권력을 행사한다.(90p)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며,

남성 페미니스트란 자신이 속한 남성 중심적 사회에 스민 여성혐오적 관점과 편견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반성하며, 자신에 대한 여성들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언제든 의도와 상관없이 성 불평등 구조 안에서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잊지 않는 그 모든 실천으로서만 존재한다. (44p)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누구든 공론장에서 자신의 발언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시민들에게 도덕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초월적인 용기가 아니라 옳은 발언을 할 때 너무 큰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함께 구성해 가는 것이다.(70p)


그리고 그것을 위해 권력을 지닌 자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하고,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만큼의 권력을 지닌 이들이 불의에 대해 침묵할수록 불의의 피해자인 사회적 약자의 발언엔 더 많은 용기와 부담이 요구된다.(71p)


그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안온한 통념의 세상에 이물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언어'와 '합리적 공론장' 그리고 '몰상식을 공론장에서 몰아낼 실질적 힘'이다.

통념의 관성, 그 물리적 힘 앞에서 프로불편러의 민감함이란 소수의견으로 쉽게 무시되거나 배제된다.나의 민감함이 관념적 독백이 되지 않기 위해선 상대에게 ‘인식’되는 것이 우선이다. 하여 공적 논의 안에서 비판적 글은 일종의 거슬림을 통해 물질적 존재감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안온한 통념의 세상에 이물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언어. 무시하자니 뾰족해서 신경쓰이고 부수자니 생각보단 단단한 그런 언어로. (141p)
상식이 유의미한 사회적 구속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상식과 몰상식의 합의된 기준을 마련할 합리적 공론장과 그 렇게 구분된 몰상식을 공론장에서 몰아낼 실질적 힘이 필요하다. (173p)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한 실천적인 힘이다.


나도 이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해볼까 한다.


나와 나의 사랑하는 여자들과, 나의 사랑하는 남자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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