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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Nov 30. 2019

그래, 나 페미니스트다 어쩔래?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억압의 역사에서 가장 이야기 하기 어려운 소재는 서구의 흑인 여성이라고 했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미시적 관점, 주변부를 드러냄으로써 탈중심화를 외치던 포스트식민주의 수업에서 교수님이 한 말씀이었던 것 같다. 서구 사회에서 흑인 여성 이야기는 억압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야기면서도 생활 속 깊숙이 파고든 지배계급의 언어와 사고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힘든, 이제껏 공론장에서 배제되어 실질적인 언어조차 부족한 상태이기에 허구로 현실을 베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어려운 미국의 흑인 여성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읽어볼 만한 <나쁜 페미니스트(Bad Feminist)>. 이 책은 아이티계 미국인 록산 게이가 쓴 에세이집으로 현대 페미니즘의 고전이라고 어마무시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핑크핑크한 책 디자인이 가히 부담스러웠지만 그 핑크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작가는 페미니스트이지만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여성 비하적인 가사의 노래를 듣기도 하고, 핑크를 좋아하는 나쁜(부족한) 페미니스트임을 인정하며 페미니즘 안에서 페미니즘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것이었다. 극한의 동일성에 가까운 평등을 과격하게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페미니즘이 대단한 사상처럼 칭송되거나 과격한 혁명 사상으로 오인받는 극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에서 책의 표지마저 핑크핑크 하게 꾸민 것이 매우 세심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페미니즘 운동은 큰 지지 기반을 갖거나 목소리가 크고 선동적인 유명 인사들과 엮이곤 했다..(중략)... 이런 유명인들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면 그들을 페메니스트 왕좌에 올려놓고 떠받들고 칭송하다가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바로 무대에서 끌어내리며 페미니스트 리더들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므로 페미니즘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페미니즘과 '전문가적 페미니스트 Professional Feminists'를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단점과 모순으로 똘똘 뭉친 보통의 인간이니까. (p13)


그러고 보니 나도 페미니즘에 대해 아주 무지했을 때 페미니즘을 시대마다 옷을 갈아 입는 '혁명적 사상(-ism)' 취급을 하며 그 공격성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나는 공격적이면서 결함이 있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결국 모든 것은 결함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진실에서 그 불호는 내 주위에 흩뿌려진 수만가지 세상사에 회피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모든 목소리가 소음일 뿐이었고, 귀찮고, 무관심했던 것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시끄러운 소리로, 단순한 언어로 치부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악으로 귀결되는지를 몸소 깨달은 지금으로서는 무지했던 지난 날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 록산 게이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위근우 작가님의 말처럼 인간으로 태어나 모두가 인격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모두가 페미니스트일 수 밖에 없는 것을. 무지했던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입고 있는 과격한 이미지가 두려워 그것을 제대로 알아가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부인했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p15)


결국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스스로가 완전무결하려는 말도 안되는 욕심과 두려움을 집어 던지고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불완전하지만 일상적인 노력으로서의 페미니즘이었다. 일상 속 차별과 혐오를 예리하게 인식하고 잘근잘근 씹어 삼켜 해방의 언어로 소화해 내는 움직임 그 자체가 페미니즘인 것이다. 정형화된 이미지도, 완벽한 목표치도 존재하지 않은 움직임 그 자체. 평등을 향한 움직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이다.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p17)


이 책은 여러 소재의 에세이가 묶여 있는데, 사실 그 소재라는 것이 한국 문화와는 상이하다보니 가슴에 팍팍 와닿지는 않았다.  사회에 만연한 성폭행 사례와 그것을 이용한 농담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폭력이 존재해도 침묵하는 한국 분위기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적나라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적나라하다'라는 문화적 선입견이 생겨버리니 그것을 소재로 진행되는 에세이의 글이 마음에 쏙쏙 와닿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종 차별 문제에 있어서도 내가 차별로 부터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촌동네에서 자라온 내가 인종 차별을 당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탓에 대중매체 속 인종차별 문제라던가 특정 인종을 배제하고 놀리는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질적인 소재들로 인해 작가의 글을 빠르게 또 완전하게 공감하기 어려워하면서도, 꾸준히 읽어 나가기만 하면 그 안에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캐내는 사랑스러운 순간들도 포착할 수 있다. 나와 다른 문화권에서 나와 같은 인간의 감정으로 차별에 맞서는 사람이 있다는 동지애가 싹트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크건 작건 수많은 부당함을 목격하면서 생각한다. 끔찍해. 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싸움을 해줄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침묵을 지킨다. 침묵이 더 쉽기 때문이다.
 Qui tacet consentire videtur. 라틴어로 "침묵은 동의를 의미한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나를 향한 이런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 된다. (p168)
내가 진짜 놀란 건, 정말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의 쇼를 보고 있던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딱 한 명만 일어나서 확신을 갖고 "이제 그만해요."라고 말했다는 것 말이다. (p170)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소수 인종을 경멸하는 비판자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 목소리를 내면화 하는 과정을 보여줬던 작가의 사례였다. 우리가 혐오에 맞딱뜨렸을 때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사회에 반항하며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 불의를 인식하고 부당함을 바로잡는 것 등일 것이다. 록산 게이는 순응적이고 모범생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 패턴을 익혀왔던 터라 두 번째 선택을 했다. 아마 가장 유약하고 비굴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랬듯.


대학원 다닐 때 복도를 걸어가다 같은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이 연구실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그 친구는 내가 엿듣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동기들에게 내가 소수 집단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 덕분에 들어온 학생이라고 말했다.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붙잡고 일단 내 연구실로 들어왔다. 학교 복도에서 눈물이나 훔치는 그런 여자애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연구실 문을 닫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건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내가 여기에 속할 만큼 충분히 똑똑하지 않고 세상 사람 모두가 그걸 알게 된다는 것.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 여자아이와 어쩌면 다른 학생들까지도 나를 그렇게 본다는 사실은 씻기 힘든 상처가 되었다.....(중략)...
대신 어떤 핑계도 대지 않기로 했다. 프로젝트를 세 배로 늘렸다. 대체로 항상 톱클래스를 유지했다. 물론 시간은 부족했으나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쳤다. 졸업 시험 준비를 철저히 했고 논문 계획서를 쓰고 통과했다. 내 글을 출판했다. 논문을 위해 야심찬 리서치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생각만 해도 죽고 싶게 만드는 기획이었다. 무엇을 하건 어딜 가나 그 여자애 말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내가 해낸 것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해내지 않은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내가 우리 과에 들어올 실력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동기생들은 나를 옹호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 또한 내 마음을 후벼팠다. (p277-278)


록산 게이는 스스로에게 가혹했다. 아마 자신에게 덧댄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들도록 네가 노력해야지'라며 혐오를 강화하는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벌로 소수를 멸시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귀신처럼 따라 붙는 병에 걸렸다. 그 때 록산 게이가 '너의 말은 악의적이다. 설사 우대정책으로 내가 대학원에 들어왔다 해도 그것이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침묵의 동의를 깨뜨려버렸다면 그런 몹쓸 병에는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에게 하지 못할 말은 나에게도 하는 것이 아니다. 록산 게이도, 나도, 자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록산 게이의 저변에 깔려 있던 그 논리는 '체면의 정치'라고 한다.


체면의 정치(respectability politics)란 흑인이(혹은 소수 인종이) '문화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만 행동하고 주류 사회 문화를 모방하기만 한다면 인종 편견에 시달리는 일이 적어질 것이란 개념이다. 그러나 체면의 정치는 제도상의 인종 차별주의, 즉 현대의 교육 제도, 복지 제도, 사법 제도가 흑인 사회의 문제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p243)


우리나라로 치면, '동성애를 혐오하지는 않지만, 보기는 싫으니 동성애를 반대한다'라는 논리는 문화적으로 용인된 방식 속에서 동성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사례, '여성이 승진하려면 육아휴직을 내지 말고(애 핑계 대지 말고) 남성과 똑같은 시간 일해라'라는 논리는 남성 위주의 회사 문화 모방을 부추겨 소수인 여성의 필연적 결함을 만들어버리는 사례이지 않을까? 어찌됐든 이러한 논리들은 보편적으로 당연시 되던 문화에 소수의 특이성을 구겨넣어 획일적이고 균일한 기성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임에 틀림 없는 것 같다.


페미니스트로서 완벽하지 고 결함이 있다는 비난은 결국 그를 침묵시키기 위한 말이다. 그런 비난에 굴복해버린다면 세상에 페미니즘은 존재할 수 없다. 더 이상 '완벽함'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해방 선언, 즉 여성 해방을 위한 인간 해방 선언은 페미니즘이 숨쉬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해방 선언 이후 성장하고 단단해진 작가의 언어는 신나게 통렬하고 결함 있는 날 것 그대로 당당하다. 그녀의 신랄한 매력에 빠진 독자라면 아마 이 책을 덮고 나서도 이런 말이 주문 처럼 쫓아다닐 것이다.


"그래, 나 나쁜 페미니스트다. 어쩔래?"


뭐. 괜찮다.


부족하긴 해도 여전히 나는 페미니스트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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