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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n 19. 2020

고기가 싫지만, 수육을 삶는다

아빠가 엄마의 밥상을 기다리는 이유

나는 아빠를 잘 모른다.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에는 불콰해진 얼굴로 쓰러져 있는 아빠와, 그렇게 누워서도 고단하게 부풀어 오른 아빠의 배, 그리고 아빠의 배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듯 앉아 화창하게 웃고 있는 어릴 적 나와 내 동생이 있었다. 아빠는 그 시대의 부름에 성실히 응답한 사나이였다. 내가 깨어나기도 전에 색 작업복을 입고 집 밖으로 나섰고 짙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과로와 과음은 사회생활의 미덕이었다. 주말 없이 일했고 일에 쫓기던 아빠의 담배는 꺼질 새가 없었다. 어색하게도 쉬는 날이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잠만 잤다. 그 시대 대부분의 아빠는 그의 부재로만 가족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었다. 나는 쉼 없이 돌아가던 그 찬란한 시대에 아빠를 빼앗겼다.

국가부도의 날을 지나 아빠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 아빠는 그의 침묵으로 예전의 부재를 대신했고 가끔은 몇 마디 말과 호통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포효를 했다. 아빠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모르게 늘 성나 있는 사람처럼 아빠가 두려웠다. 나는 가장 연약한 존재로 태어나 부모의 젊음을 갉아먹고 어른이 되었음에도, 항상 그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의 부재만을 기억했다.


몇 안 되는 선명한 기억 속에서 아빠는 늘 엄마의 밥상을 기다렸다. 10년 넘게 자취를 하며 스스로 밥을 지어먹었지만 그 실력은 엄마 몰래 드러낼 뿐, 꼭 엄마를 기다려 밥을 얻어먹었다. 가끔은 밥상에 고기가 없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기도 했다. 엄마는 어쩌다 한 번 삶은 밥과 김치로 끼니를 때우려 했다가 자식들 앞에서 아빠의 고자질을 들어야 했다. 아빠는 엄마가 자식들만 챙기고 자신은 뒷전이라며 나에게 종종 고자질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큰 소리로 받아치며 아빠를 얼마나 왕 받들듯 했는지 고래고래 나열했다. 

엄마는 육고기가 싫지만 고기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매일 고기를 삶았노라 말했다. 아빠의 건강을 생각해서 지방질 적은 돼지 뒷다리 살을 푹 고와 기름기를 걷어내고 단단한 살을 썰어내서 슴슴한 돼지고기를 대접했노라 말했다. 아빠는 엄마의 항변에 곧잘 수긍하는 편은 아니지만 고자질의 끝에는 꼭 씰룩이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잇몸을 드러내 웃고야 말았다.

엄마는 아빠와 30년 넘게 싸우고 나서야  사람의 사주에 원진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원진살이란 까닭 없이 서로 미워하는 궁합인데, 아빠는 엄마에게 더 사랑받지 못해 미워하고 엄마는 아빠가 아무리 줘도 사랑받지 못해 미워하는 듯했다.

엄마는 아빠를 위해 수육을 삶았다

엄마는 외출할 때면 2시간만 지나도 안절부절 못했다.


"네 아빠 밥 차려줘야 하는데.."


24인치 허리에 후리아 치마를 두르고 금테 안경을 썼던 그 멋쟁이 처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밥을 차려내는 엄마로 40년을 살았다. 잡채를 한 대접 먹고도 배곯는 소리를 내는 삼 형제를 먹이고 입히던 세월이 엄마의 손목과 무릎과 손 끝과 발 뒤꿈치 어디에 녹아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들에게 부지런히 밥을 차려 먹이는 것은 엄마 자신이 아니라 그 세월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예전 같지 못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자식들의 밥상을 차리고는 꼭 몸져누웠다. 그런 엄마가 안쓰럽지도 않은지 아빠는 꼭 엄마 보고 밥상을 차리라고 했다. 아빠의 생일에도, 명절에도, 자식들이 찾아온 날이면 한 번쯤 모시고 나가 외식 한 번 해보려는 자식들의 청을 극구 사양했다. 자식들의 속도 모르고 집에서 먹는 게 맛있고 좋다며 세상 순진한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럴 때면 엄마는 오래된 시간이 선사한 찐득한 정으로, 그 익숙함으로 또 한 번 밥상을 차려 냈다. 물에 직접 담근 된장은 풀고 양파와 무우를 넣은  삼겹살로 수육을 삶았고, 한 겨울 딸내미와 쪼그리고 앉아 양념을 치댔던 김치를 내고, 소고기 사태살을 삶아 얇게 저민 후 얄싹한 채소를 둘러 양장피 없는 양장피 요리를 만들었으며 아빠가 좋아하는 쫄깃한 식감의 오징어와 전복을 쪘다. 엄마의 밥상 앞에서 기분 좋아진 아빠는 글라쓰 째 소주를 들이키며 겁 없이 머리만 커버린 자식들에게 노래하듯 훈계했다. 가장 즐거운 순간 조차 쓸모 있어야 한다는 그의 성실함은 밥상머리에서도 분주히 일했다. 그 덕에 아빠는 딱 아빠만큼 모범적이고 성실한 자식들을 키워냈고, 그 자식들은 딱 아빠처럼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느라 아빠 곁을 떠났다. 이제 부재는 아빠가 아닌 자식들의 몫이 되어 버렸다.

엄마가 차린 아빠의 생일상

아빠는 고독을 당신의 운명이라 여겼다. 자식이 보고 싶은 마음도 혼자 꾹 참았다가 엄마를 시켜 전화 한 통을 해놓고는, 수줍게 몇 마디 호통치고 얼른 끊어 버렸다. 할아버지가 된 아빠의 고독은 여전히 긴 기다림이었고, 그 안에는 엄마가 해준 밥을 무심하게 우걱우걱 먹고 있는 자식들에게 던지곤 했던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너희는 좋겠다. 엄마가 있어서."

엄마가 차려준 밥상

아빠는 엄마가 없다. 태어나자마자 홀로 고모님의 손에 키워졌다고 했다. 10명이나 되는 배다른 동생들과는 뚝 떨어져 고모를 엄마로 여기고 커야 했던 사연은 구구절절 알지 못하지만, 아빠가  엄마의 사랑도 모르고 짖궂은 형제의 정도 모르는 무지막지한 통뼈로 자라난 것은 분명하다. 아빠는 가난하다고 놀리는 부잣집 도련님들의 앞니를 4개나 박살 내버리는 씩씩한 어린이가 되었고, 없는 살림에 시내로 유학 가서 억척같이 공부했던 소년이 되었고, 자랑스레 군복을 입고 맵시 있는 후리아 치마의 그녀를 기다리는 청년이 되었다. 아빠가 된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서러웠던 두 가지를 기억해 냈다. 하나의 서러움은 배고픔이었고, 또 하나의 서러움은 엄마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엄마가 없다는 것이 배고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자식들에게는 그 서글픈 마음을 물려주기 싫어 자식들에게 엄마를 양보하고 홀로 일터에서 고독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자식들은 아빠의 고독과 엄마의 세월로 지은 밥을 별 기탄없이 우걱우걱 씹어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가 해준 비빔밥과 미나리 숙회

엄마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빠를 위해 엄마는 아빠와 징글징글하게 싸우면서도 아빠에게 매 끼니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었다. 정작 엄마는 육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타고난 소음인이라, 고기보다는 가볍게 야채를 올리고 들기름에 밥을 비빈 고소한 비빔밥이나 살짝 데쳐 둘둘 말아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 미나리 숙회가 좋다고 했다. 엄마가 특히 좋아하는 건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싱그럽고 육질이 쫄깃한 회다. 얼마 전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회가 너무 먹고 싶은데 자식들 없이 사 먹긴 아까워서 먹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엄마를 양보했지만 엄마는 가족들에게 식성을 양보했다.


나는 엄마가 잃어버린 후리아 치마와 금테안경, 그리고 엄마의 이름 없는 밥상들을 생각했다.


나는 배가 고파 몰래 아이스크림을 까먹으면서도 기어코 엄마의 밥상을 기다렸던 아빠의 단단하고 서글픈 고독을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무심한 세상의 언저리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짓이겨진 순간에도 나를 잊지 않았던, 소리 없이 내 삶을 살찌웠던 것들을 생각했다.




자식들이 다 떠나고 넓어져 버린 집에서 아빠는 엄마와 두 손을 꼭 맞잡고 누워, 언젠가 아빠가 죽으면 엄마 무덤 옆에 묻어 달라고 말했다. 아빠는 당신의 고독이 들통날까 봐 그렇게 그리워하던 엄마의 무덤이 어딘지는 꾸욱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미소로 엄마의 밥상을 기다렸다가 말해주려는 지도 모른다. 점심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전화 넘어 엄마 목소리가 바쁘기만 하다. 오늘도 엄마는 수육을 삶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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