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다. 우스갯소리인 것만 같던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은 희망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하게 울리는 자조 섞인 외침이다. 세상에 혼자 남아, 대답 없는 바램에 지쳐 잠들지 못하는 나날들 끝에 세상이 미워서 새어 나오는 구슬픈 탄식인 것이다.
세상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두려워진다. 밖으로 나가는 한 걸음이, 밖으로 내뱉는 한 마디가 모두 두렵다. '나'라고 믿었던 모습이 와장창 깨지고 파편들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다. 매일 몰래 상처 받는다. 파편들이 모두 각자 통점을 가지는 바람에, 사방이 적이고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다. 이쯤 되면 타인이 지옥이라 불릴만하다.
'헬조선'에서 '이번 생은 망'했다는 우리는 일그러진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어른이라면 응당 젊은 이에게 인생의 고단함을 알려주고 싶다. 어른이 늘어놓는 장광설은 자신의 지난 날을 애도하는 비밀스러운 어리광이다. 수다스러운 혼잣말로 자신의 위신이 바로 서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광의 검은 속내다.
어른은 기억력도 좋지 않다. 다람쥐 도토리 까먹듯 살면서 많은 것을 까먹는데, 특히
어쩌다 내가 이렇게 세상을 미워하게 되었는지, 나는 어떤 희망을 품었는지, 어떤 선택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도토리를 잊은 다람쥐가 도토리 따던 노고를 생각할 리 없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시간에는 그들만의 이유와 노력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 분명 그들에게도 방황했던 시간이 있었을 텐데, 처음이라 두렵고 조금 느리지만 천천히 나아갔던 경험이 있었을 텐데, 내가 얼마나 많이 애썼는지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다른 이들의 인생도 쉽게 폄훼한다.
결국 어른이 타인을 미워하고 세상을 미워하는 이유는 자신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내가 미워서 더 나아지려고 애쓰다 보니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살았다. 인생의 서사는 쓸만한 에피소드 형식으로 갈라져 굵직한 뭉티기가 되어있다. 그 사이사이에 어떤 하루를 보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까마득하기만 하다.
미움으로 시작한 노력은 끝이 있다. 어른의 역할놀이에 영혼을 끼워 맞추려 끊어냈던 작은 하루의 감정들이 똥파리처럼 달려들어 정신 사납게 앞을 막는다. 술도 언젠가는 깨고, 구토도 멈춘다. 앞다투어 달려가던 인생의 어디쯤,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제껏 뭐하고 살았지.
별 다른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나에게 더 자주 이런 시간이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만의 괴로움은 아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고독할 운명을 타고났지만 모두가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 공감과 연대의 시작이라고 했다. 연대는 내 인생이 나와 타인 모두에게 의미있다는 연결감을 선사하고 연결감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배태한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렇기에 희망을 잃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희망은, 있다.
늦지 않았다. 너무 먼 길을 달려와서 잊었던 마음들을 꺼내 들어야 한다. 타인의 시선에 굴복한 불안함을 알아차리고 조금은 희한한 경험도 쌍수 벌려 환영해야 한다. 세상을 미워하기 전에 멋모르고 꿈꿨던 것들을 되찾아야 한다.
순간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써야 할 시간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내 글이 인기가 많지도 않지만 아무런 바라는 것 없이 내 속에 글이 끓어오를 때면 브런치의 하얀 화면을 켠다. 어쩌다 한 번씩 혼란과 고통 한가운데에서 내 글을 읽은 단 한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될 것이다. 바다 깊은 곳에 뿌리내려 세차게 흔들리는 물풀처럼 내 뜻과는 관계없이 흐르는 검은 파도에 흔들리며 썼던 글은 지금 보아도 뜨겁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그러나 그때의 나처럼 해명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이가 내 글을 읽었을 때, 내가 했던 사소한 선택들이 그들의 꽉 막힌 순간에 한 줄기 대안이 될 수도 있음을,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한 줄기의 날숨이 될 수 있음을, 지금이 인생의 끝이 아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내 부끄러운 글을 지우지 않는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아팠던 이를 애도하며 글을 쓴다. 얼마 전에는 정인이를 위한 헌정곡을 썼다. 한 달여간 고민하고, 20시간이 넘게 글을 썼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렇게 긴 글을 읽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하고, 수많은 정인이를 만나야 하는 직업이기에 그 아픔에 함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정인이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이의 죽음이 모래주머니가 되어 내가 가는 길마다 무겁게, 또 조심스럽게 나를 짓누른다. 그렇게 글은 나의 현재이자, 지나간 혼란이자, 앞으로의 태도가 된다.
글은 신비한 힘이 있다.
내 안에 엉켜있는 물음표들을 한 글자씩 풀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글대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던 나를 미워하다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열심히 살았다는 이유로 오답이 되어버린 나를 돌보기 시작한 것도,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글로 꿰어내면서부터였다.
삶의 모든 경험은 잠시 빌려온 것일 뿐이라는 인식의 시초가 우울이고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불안한 것이라면
이왕 빌려온 거 사는 동안 내 분수에 맞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고
죽음 앞에 평등한 인간이니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살면서 절대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타협하는 인간이 되지는 말자.
두려워서 적당히 살아 놓고는 세상을 미워하는 일그러진 어른이 되지는 말자.
타인을 용서하고 나와 화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희망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