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리복주 박풀고갱 Dec 10. 2019

사랑으로도 할 수 없는 게 많다

료칸의 추억

최와 박은 일본의 알프스 등정은 시도도 못해보고 베이스 캠프인 다카야마를 떠나고 있었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캐리어 바퀴에 눈들이 뭉쳐 잘 끌리지 않았다.

길 안내하는데  한사람이면 충분할 것 같았지만, 일본여행 경험상 일본은 항상 충분히 안내 요원을 두는 것 같다.
눈을 뚫고 JR 다카야마역으로 가는 길

눈뭉치들이 기차 발목까지 잡았나보다. 정확한 출도착을 자랑하는 천하의 일본 열차가 연착이다. 역내 식당에서 키쯔네 우동(きつねうどん)을 먹으며 기차를 기다렸다. 열차를 기다리며 우동으로 요기를 하겠다는 생각은 비슷했는지 한국인 부자(父子) 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폭설로  발이 묶인 한국인이 최와 박만은 아니라서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아버지는 70대쯤으로 보였고 아들은 40대로 보이는 부자였는데, 행선지가 운행이 중지된 도야마였다. 아들은 최와 박이 게로로 간다니까, 아버지에게 게로로 가자고 설득했으나 깐깐한 교장 선생님처럼 생간 아버지는 택도 없는 소리라며 꼭 도야마로 가야 한다고 했다. (역시 부모님과 자유여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게로로 가는 중

게로에 내리니 일본 3대 온천 도시 중 하나답게 플랫폼에서부터 온천물이 최와 박을 맞이한다.  (그 부자는 도야마에 무사히 갔을까?)

박은 택시를 타고 싶어했지만, 택시비가 아까웠던 최는 다카야마보다 아래쪽이라서 그런지, 온천물 덕분인지 눈이 많이 쌓이지는 않았다며 료칸까지 걸어갈 것을 주장했다.

택시를 탈 걸 그랬나. 바퀴에 뭉치는 눈에 캐리어가 점점 무거워지고 게다가 오르막이다. 최는 후회를 하며 박의 눈치를 봤다. 그나마 작은 동네라 눈치는 잠깐이어서 다행이었다.

다카야마에서 게로까지 최와 박을 실어다 준 기차. 수고 많았어.
게로 역 앞의 온천물

료칸 앞에 도착하자 환영 명단에 choi 라는 필기체가 최와 박을 맞아주었다. 한자 이름들 사이에 알파벳 choi 가 어색하게 끼어있었지만 료칸 측의 배려에 기분이 좋아졌다.

게로의 사사라인 료칸 입구

어얼리 체크인이 되지 않아, 짐을 맡기고 근처 관광지인 게로온천 합장촌(下呂温泉 合掌村 げろおんせん がっしょうむら 게로온센 갓쇼무라)까지 걸어갔다. 온천 마을답게 곳곳에 공짜 족욕탕이 보인다.


게로온센 갓쇼무라의 입장료는 800엔. 시라카와고에서 집 하나 들어가는데 300엔이었는데 여긴 마을 전체가 800엔이니 싸다고 해야 하나. 체크인까지 딱히 할 일도 없으므로 더 따질 것도 없이 들어갔다. 한국으로 치면 민속촌 같은 곳이었다.  갓쇼무라에도 전통 가옥에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사진을 보니 시라카와고에서 먹었다고 생각했던 모주 비슷한 술은 갓쇼무라에서 마셨더라. 어쩐지 시라카와고 사진에서 모주와 스님 사진이 없더라니. 기억은 쉽게 왜곡된다. 두 잔 마실 맛은 아니었지만 두 번 추억하게 됐네.

게로온센 갓쇼무라의 무료 족욕장
스님처럼 보이는 분이 이로리いろり에 술을 데워 팔고 있다.
갓쇼무라 풍경들
온천을 하는 개구리. 머리 위에 수건을 얹어 놓은 디테일에 감탄한다. 일본 개구리는 '게로게로'하고 운다는데  '게로'온센이니까 개구리 인형을 놓았나보다.
갓쇼무라 구내 식당 한켠에서는 생선을 말리고 있었다. 이색적이다.
갓쇼무라 구내 식당. 라멘과  笹ずし(사사 즈시)와 돼지고기 덮밥, 그리고 게로 한정 맥주. 컵의 온천 모양이 귀엽네.

체크인 시간에 맞춰 료칸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안내해주는 메이드가 최에게 여성용 기모노(着物 きもの)를 무료 대여해주는 이벤트 기간이라며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최는 과연 자신의 몸에 맞을까를 걱정했지만, 적당해 보이는 무늬를 하나 골라서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료칸보다 훨씬 저렴한 온천 호텔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개인 야외 온천이 마련되어 있었다. 야외 온천이라고 해봤자 히노끼 탕이 방 밖에 놓여있는 정도였다. 이왕 돈 쓰는 거 좀 더 쓸 걸 그랬나. 최는 이런 후회가 박에게 들키지 않도록 속으로만 생각했다.


기모노는 역시, 최의 몸매와 어울리지 않았다. 설명서를 보며 겨우 입긴 하였지만, 동그랗게 나온 배가 도드라져 보여 우스꽝스러웠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아 기념촬영을 하고 널널한 유가타(浴衣 ゆかた)로 얼른 갈아입었다.

최는 박에게 저녁식사 전 구경이라도 할 겸 대욕장에 가보자고 했지만, 박은 방안에 온천이 있는데 굳이 뭐하러 가냐고 단칼에 거절한다. 아니, 이런 료칸에 언제 또 와 볼 거라고, 대욕장도 경험해보면 좋을텐데, 왜 공짜인데 안 하는지 최는 좀 약이 올랐다. 하지만 쿨한 척하며 혼자 대욕장으로 향했다. 사랑을 무기 삼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랑으로도 할 수 없는 게 많다는 걸 받아들여야지.

대신 최는 일부러 천천히 목욕을 하며, 박이 방에서 최가 언제 오나 애를 태우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릴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웬걸?! 방으로 돌아가니 박은 야외 히노끼 탕에 누워  맥주 한 캔을 홀짝이며 애간장 대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그렇다. 담배다. 일본은 흡연자 천국이다.)

젠장. 대욕장에서 시간을 끌며 애간장을 졸인 건 최일 뿐. 역시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감정이나 태도까지 컨트롤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가이세키 석식이 나왔다. 대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이 정갈한 요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무엇보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흰 쌀밥이 너무 맛있었다. <명가의 술>이라는 일본 만화를 보면 일본인들은 쌀에 대한 자부심도 남다르던데, 쌀농사를 잘 지어서인지 일본에서 먹은 흰 쌀밥은 거의 다 맛있었지만 이건 더 특별났다. 최와 박에게 식사는 안주와 동급이라서 밥은 웬만하면 다른 안주를 위해 거의 안 먹는 편인데 이 밥은 어찌나 맛있는지 솥에 눌러붙은 누룽지까지 싹싹 긁어먹고 싶을 정도였다. 밥과 요리와 술을 거의 목까지 차오르도록 차곡차곡 쌓아올렸 건만, 이 놈의 은혜로운 소화력!

다음날 아침, 가이세키 조식도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나왔지만 비주얼만으로도 맛보고 싶은 요리가 많아 먹고 또 먹었다. (일본인이 소식한다고 누가 그랬나요?)


그런데 료칸 숙박은 두 번 할 경험은 아닌 것 같다. 비용 때문만은 아니다. 가성비는 충분했으니까.

최와 박보다 나이 드신 분이 무릎을 꿇고 서빙을 해주니까 가만 앉아서 받을 수만은 없어서 자꾸 엉덩이가 들썩였다. 서비스도 누려본 사람이 누리는 건가 보다.

여기까지 가이세키 석식
가이세키 조식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해도 터치할 수 없는 영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