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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자 혜운 Oct 13. 2016

네가 원했던 삶을 살고 있니?

지금 우리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몇 년 전 지인의 부탁으로 학업중단 위기의 청소년들을 만났던 적이 있었다. 요즘에는 학교 교장의 재량으로 고등학교 자퇴를 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2-3주의 숙려기간을 주고 상담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제도가 있다. 그러한 서비스를 통해 학생들의 학업중단을 막아보자는 취지인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게끔 설득을 해야 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은 상담사였다. 대략 4번의 상담을 진행할 수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50분씩 단 4번의 기회.

그 시간 동안 내가 처음 보는 학생과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그 학생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그리고 자퇴 여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과연 이 상담의 주요 쟁점이 되어야만 하는가.


학생들을 만나기 전, 혼자서 몇 가지 정리를 해보았다. 우선은 내가 그들보다 몇 년 더 살아본 사람으로서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겪게 될 여러 가지 사회적 어려움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단점을 듣고 난 후 선택을 하면 그에 대한 예방이나 대책을 미리 마련할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에 그러했다. 둘째로는 학교가 다니기 싫은 이유에 대해 듣고 난 후, 고등학교 생활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틀을 제시해 주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학교에는 공부만 하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배우기 위해 다니는 곳이고, 나의 의견에 대해 분명히 표현할 줄 알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연습하는 곳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어 하는 이유가 다양해서, 내가 준비한 이야기가 적절하게 적용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자의 속사정을 들어보면 각기 다른 이유가 있는데, 어떤 학생은 강압적인 아버지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학교를 가지 않는 경우였고, 다른 한 명은 늦둥이로 태어나 가정 내에서 소외감을 겪다가 학교를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등교를 거부하였던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가정 내에서 절제와 인내를 배우지 못해 즉각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며 지내느라 학교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학생들과 단 3-4번 만의 만남으로 어떠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인지 답답한 마음이 아니 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개입을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야 했다.


교육 정책, 학교 구조 자체, 가정 내 문제, 개인적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점들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심리학자/상담자인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학생들 스스로가 어떤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지 명확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어느 누구의 탓으로 그러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원해서 선택을 한다는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리 만남의 핵심이 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타당한 이유를 만들기 마련이다.

추후에라도, 행여나, 자신이 학업을 중단 혹은 유지하게 된 이유가 내가 아닌 남의 탓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스스로가 또다시 핑계를 대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에,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원해서 학교를 그만두거나 유지한다면 그 선택에 대한 이유를 자신의 안에서 찾게 될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원해서 학교를 중단/유지하였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울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지금은 각자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부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느 누구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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