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상해서 내가 더 좋아하는 거 티내기 싫어”
어느 날 현신이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정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항상 본인이 ‘을’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만나자고 하는 것도 항상 현신이가 먼저, 연락도 항상 현신이가 먼저. 더 많이. 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신이의 기억 속에는 본인이 먼저 표현을 하고, 더 많이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현신이의 친구는 현신이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와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서 그 또한 서운하다고 한다. 그렇게 현신이는 자신에게 연연해하지도 않고 도도해하는 친구에게 더 이상 연락을 하지도 않고, 마음을 접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한테 서운하다고 얘기는 해봤어?
너는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데 그 친구는 너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얘기는 해봤냐고.”
역시나 대답은 “아니.”였다. 자존심이 상해서 죽어도 그 말은 못하겠다고 한다. 무슨 자존심이냐고 재차 묻자 아니다 다를까. 이런 대답이 나온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게 자존심 상해. 왜 나만 혼자서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하는 거야. 그럴 바에 안 하고 말아.”
현신이가 무슨 답을 할지 너무나도 예상이 잘 되는 건, 많은 이들이 현신이와 같이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별게 아니다. ‘나만 좋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게 마련이고, 그 서운함이 갈등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최소 관심의 원리(principle of least interest)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Willard Waller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던 내용으로 관계에서 더 많은 파워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가 끊어져도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힘을 더 가지게 되어, 관계에서 갑-을 관계가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 ‘내가 더 좋아하니까 나만 더 애타고, 나만 힘들고, 나만 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은’. 이 감정이 그냥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파트너는 왜 우리의 관계가 끊어져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갑자기 샛길로 빠지는 기분이기는 하지만, 나의 파트너는 진짜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혹은 사람을 믿지 못해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일수도 있다. 이때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고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나의 파트너의 마음에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조금 더 진실된. 그리고 좀 더 깊고 신뢰로운 관계를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상대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사소하고 작은 서운함으로 인해 우리는 갈등을 시작하게 되고, 그 작은 갈등이 결국엔 관계의 끝을 보게 되는 상황으로 가기도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그에게는 더 많이 기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더 크게 실망을 하게 되기 때문에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우리는 서운한 마음이 더 크게 생기고, 더 많은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우리는 서운한 마음. 즉,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는 말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 또한 내가 더 좋아한다는 것이 드러나는 말이기 때문에 ‘자존심상’ 그렇게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솔직하게는 말 못하겠고, 그렇다고 내 불편한 마음을 표현 안 하자니 죽겠고. 그래서 우리는 관련 없는 트집을 잡아서 상대방을 비난하게 되고, 상대는 타당하지 않은 일로 너무 큰 화를 내는 내 모습에 지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솔직한 내 마음을 표현하면 강도 1의 싸움으로 끝날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강도 10의 싸움으로 끌고 가게 되고 결국엔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모두 표현하고, 만나는 동안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면 그 관계가 결국에 부정적인 결말을 맞이한다고 해도 내가 더 행복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사랑을 할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그이가 더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그저 행복한 giver가 되어서 내 마음을, 내 사랑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마음껏 표현해보도록 하자. 이기고 지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저. 내가 지금 이 순간, 좋아할 수 있는 상대가 있고, 그 상대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더 많이 좋아하는 것을 아까워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무조건 사랑을 다 표현해야 하는가?
아니다. 절대로 관계에서 ‘을’이 되려고 하지 말자.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하되, 관계에서 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갑’에게도 몹쓸 짓이다. 내가 을의 자세를 취하니, 상대 또한 ‘갑’의 위치에 올라가게 되고 이는 둘에게 모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때 우리 관계의 힘의 기울기를 좀 더 균형 있게 맞추고 싶다면, 우리는 상대에게 서운한 마음이나 아쉬운 점, 혹은 속상한 것 등.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에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질까 봐 그에게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에서 자존심을 세우지 말자는 것이지,
내 스스로 을의 위치에서 굽신거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내 사랑도 건강하게 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