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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Jan 18. 2019

[소설집 리뷰] 모서리의 탄생

모서리의 탄생을 읽다, 빙하 끝에 앉아 있는 듯한 한기가 올라 온다

모서리의  탄생,  빙하 끝에 앉아 있는 듯한 한기가 올라 온다



이 작품은 인간이 사는 ‘세상의 끝’으로 명명될 수 있는 ‘모서리’의 예리함과 그 탄생 과정,  또는 그 모서리에 걸려 피를 흘리고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목구멍에 걸려서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게  턱,  박혀 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뜨거운 무엇을 내뱉어야  하는데.  결국은 뱉지도 못하고 삼켜야 하는 사람들을  목격해야만 한다.  어떠한 치유의 방안도 없는,  상처의 현장이 난무한다.  표지의 이미지가 이를 상징한다 할 수  있겠다.  


‘나’라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타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타인으로 지칭되는 ‘너’,  ‘당신’,  ‘한’,  ‘여자’,  ‘사내’,  ‘청년’,  ‘소녀’  등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는 타인만이  나온다.  유일하게 나오는 ‘나’는 <네 개의 이름>  속에 나오는 ‘벤치’.  그리고 <소녀의 난>에 나오는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서술자로 나오는 ‘나’일 뿐이다.  그리고 서술자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브라질리언 왁싱>에서의 ‘정나나’뿐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소설 열 편을 다 읽고 난 후에 관통하는 생각은 타인의  통증(견디기 힘듦,  날카로운 것에 찔리거나 칼에 벤 상처 등의 복합적인  의미)이다.  심지어는 ‘누군가의 통증을 이렇게 깊게 들여다봐야 하나’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왜냐면 그 상처가 너무나 깊고,  그 상처는 극복이 될 것 같지  않고,  도저히 상처가 아물거나 희망 따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타인의 상처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인물의 상처와 고통이 스며들어 결국은 같이  무기력해지고 마는 상황이 되고 만다.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일일  줄이야.  그냥 들여다 보아야만 하는가.  상처는 정말 극복의 대상이 아닌  것인가.  그야말로 작가의 말처럼 체념하고 탐구하는 대상일  뿐인가.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소설 속에서 상처는 극복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체념하고 탐구하는 대상에  가깝다.”

(작가의 말 302쪽)


열 편의 단편 속에서 각양각색의 타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아물 것 같지 않는  상처,  아픔,  슬픔,  고통,  통증,  무기력 등에 깊숙하게 빨려 들고  만다.


제 1편,  <당신은 말한다>  


이 소설 속의 인물 ‘여자’와 ‘당신’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남의 생활 엿보기)을 갖게 되고,  또는 온라인 상에 떠도는 소문에 따라 어떤 상황을  공포스럽게 엿보는 사람이 되고 만다.


소설 속의 ‘여자’는 집안 곳곳에 CCTV를 설치해 두고 사무실에 나와서는 조선족 베이비시터를 시시각각  관찰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 유괴 사건과 관련되어 떠도는  괴소문에 맞추듯이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아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성을 잃고 만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를 지켜보는 또 다른  시선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당신은 이 상황을 흥미롭게,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지켜보면서 더 드라마틱하게  연출되기는 바란다.  이 당신은 누군가에게 계속  말한다.  마치 괴소문을 퍼뜨리는  주체처럼.  괴소문의 배후에 기생하는 무수한  이야기들.  그것이 양산되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아주 잘 알고  있듯이.


불편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나도 저 여자처럼 괜한 의심병을 갖고 죄없는  사람들을 의심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당신’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지켜봄을 당하고,  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막연한 공포와 불편한 마음과 이상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제 2편 <네 개의 이름> 


이 작품은 북한 인권 남북한 공동 소설집에 실렸던  작품으로,  탈북한 새터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나’이며 그것은 ‘벤치’이다.  그는 벤치에 와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밀어와  욕설,  말하지 못하는 비밀과 진실을 엿듣는 조용하고 긴  의자이다.  

그는 이름이 네 개인 여자를 안다.  그 여자는 북한말을 쓰며 이름이  ‘림미정,  이일구(219),  푸셰,  임미정’  이렇게 바뀐다.  마지막은 다시 자신이 가장 자신답다고 여기는  이름으로 개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이 현실에서 그녀의 간절한 바람만큼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림미정’과 ‘임미정’사이에서 벌여졌던 모진 경험들.  이일구에 얽힌 상처들,  중국어로 설사를 뜻하는 ‘푸셰’  등.  그녀의 이름 변천은 그녀의 처절한 삶이 축약된  것이다.  이것을 오로지 듣기만 하고 어떤 말도 도움도 전할  수 없는 ‘벤치’가 전해주고 있다.  어쩌지 못하는 현실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제 3편 <점심의 연애>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 중  하나이다.  


요가의 자세와 ‘여자’의 심리 상태가 맞물리면서 묘사된다.  얼굴이 자동차 에어벡에 처박혀 호흡이 불규칙한  여자가 호흡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그리고 통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렵고도 기묘한 요가 동작 자세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서 이미 죽어 버리고 세상에  없는 케이와의 만남,  이별,  관계를 하나하나씩 떠올린다.  


남편의 외도에 대해 모른 척하고.  남편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고.  그러면서 케이를 문득 사랑하게 된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케이가 “나를 사랑해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안일한 일상을 위협하는 것의 실체를  깨닫는 듯.  대답을 회피한다.  스스로 냉정해지는 것을 느끼고.  서늘해진 가슴으로 손으로 케이를 만질  뿐이다.  


그렇게 서늘해진 관계로.  어느 날 케이는 죽었다.  여자는 어쩐지 다시는 평안한 날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예감한다.  눈으로 뜨거운 것이 몰린다.  그리고 몸에 난 균열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가슴에도  쩍 하고 금이 간 것을 깨닫는다.  


여자는 요가 강사이다.  그래서 프라나야마(선 호흡 자세),  우스트라아사나(낙타 자세),  가루다아사나(독수리 자세),  사바사나(송장 자세)  등 상상 속에서 마치 요가를  하듯,  자신의 요가 수련 소리에 따라,  호흡을 마셨다 뱉었다 하고 근육을 이완  수축시킨다.  그렇게 하면 욱신거리며 퍼지던 통증이 잠시  잊쳐진다고 여기는 듯.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요가 자세를 따라 하게  된다.  묘한 이끌림이 있다.  


제 4편 <사막의 뼈>


열 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잔인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비(사내)가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죽이는 이야기.  아들(청년)의 장애(또는 아픔)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가두어 놓고 치유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둘의  비극을 극대화하고 있다.  


모래언덕에 있는 건설 현장의 컨테이너 박스.  그곳은 마치 사막 한 가운데를  연상시킨다.  미쳐버렸다고 여기는 아들을 키워내기가 두려운 아비는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또 그게 미안하고.  그러던 어느 날 섹스돌을 던져  준다.  그것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생명을 심어 준  아들.  그렇게 섹스돌은 ‘나’로 생명을 얻고.  아들은 그에게 ‘엄마’라고 지칭하고.  이 모양을 본 아비는 꼭지가 돌아  버리고.  끝내 아비에 의해 아들을 종말을  맞이하고.  이 비극을 고스란히 지켜 본 ‘나’도 아들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 바람과 모래먼지 속에서 아비의 긴 울음을  오래오래 듣는다.


제 5편 <미싱 도로시> (‘오즈의 마법사’에서 차용한 제목)


1102호의 아내가 실종되었다.  1603호의 아들이 실종되었다.  아내의 실종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남편의  불안한 시간들.  아들의 실종 후에야 아들의 참담함을 인식하게 되는  엄마의 당혹스런 시간들.  그 시간들을 마치 스릴러처럼 추적해  가는데.  남편과 엄마의 이름은 끝끝내 명명되지  않고.  1102, 1603으로 마치 죄수의 번호처럼  붙여진다.  그들은 남편으로서 아내의 고충을  몰랐고.  엄마로서 아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모범 답안으로만  이끌었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대변하듯이.  수인 번호로만 인지된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무지개 너머 저 어딘가”에 희망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결국은 사람을 못 견디게  만든다,  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실종에는 이 노래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우리 귀를 꽉 채우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제 6편 <극>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소설집 수록 작품)


노인(남자)은 혼자다.  소녀를 보낸 노인은 혼자다.  지옥보다 더 지옥같은 현실 지옥을  안다.  


“지옥에 관해서라면 자신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알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155쪽)


이 남자에게도 일상은 침몰한 배와 다름없었다.  슬픔은 남자에게 수시로 주먹을  날렸다.  눈을 떠도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들은 순식간에 뒤집히거나  내일로 미뤄졌다.  이 남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없는 거요.  천국이니,  희망이니 하는 게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거요.”  였다.  그래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찾은 곳이.  딸이 살아 있을 때 아빠랑 함께 가고 싶다고 했던  북극.  그곳으로 떠난다.


시오라팔룩.  북위 77도 47분.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  그곳으로 끝내 떠나는 남자(아버지/노인).  그 봄날의 잔인했던 오후를 아득하게 여기는 것 같은  남자.  쇠꼬챙이처럼 뾰족한 무엇인가가 찌르는 통증을 견뎌야  하는 남자.  시오라팔룩에서는 일상의 견고하고 촘촘했던 시공간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노인은 빙하 꼭대기에 자리를 잡았다.  길고 긴 잠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딸의 눈에도 맺혔을 푸르고 영롱한 빛깔을 떠올리며  노인은 오로라를 기다려보자고 마음먹었다.”(166쪽)


가족을 잃은 사람의 상실감.  슬픔.  그것들이 주는 일상에서의 통증.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을  때의 그 갑갑함과 아픔.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견뎌내고 싶지 않는 아픔이  있다.  그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진정한 사과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제 7편 <홀로,  코스트코>


화자 ‘너’는 ‘박 규,  만 28세,  A형’이다.  불임 클리닉에 가서 플라스틱 통에 정자를 받아 내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건강하고 멀쩡한 정자를 생산하기 위해 대형 마트에  가서 코코넛 주스를 가득 산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는 온갖 분노를 끓어  모아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한다.  ‘성은 빡(Fuck),  이름은 큐’

가짜 대학생 신분증으로 S대 캠퍼스를 4년간 누볐고.  가짜 졸업장으로 졸업을 했다.  모든 게 가짜인 것만 같은 ‘너’.  그러나 네 몸의 일부였을 그것.  그것을 플라스틱 통에 담고  나서.  너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묵직한 생각을  한다.  


알맹이가 빠져나간 빈 껍질처럼 살아가는 28세 젊은 남자.  정자를 돈과 바꾸면서 코코넛 주스를 마시며 사는  남자.  무엇이 이토록 이 남자를 세상의  끝,  모서리에 걸쳐 살게 했을까.  



제 8편 <브라질리언 왁싱>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며,  가장 최근작이다(2017년 여름).


왁싱 디자이너 정나나.  나나는 명함의 빳빳한 종이 질감이  좋았고.  왁싱 디자이너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지만 명함이  모든 것을 매끈하게 포장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며 친밀한 관계 유지를 강조하는  사장.  갑질을 일삼는 고객들.  그러나 내밀한 그곳의 털을 뽑아버리는 브라질리언  왁싱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였고,  누구에게나 균일하게 주어진 위협  같아서.  그녀는 그 일을 하면서 묘한 쾌감까지 느끼는 것  같다.  


“나나는 그렇게 구멍들을 응시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것도 저것과 다르지  않겠지,  하며 왁스와 함께 털어 엉겨 붙은 테이프를  잡아당겼다.  악!  하는 비명 소리를 들으면 나나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세 차가워졌다.  문제라고 느꼈던 것들이 털 뽑힌 살처럼  매끈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안도했다.  이 기묘한 위안이 나나의 주눅 든 어깨를 다독이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꼭 그렇게까지 공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209쪽)


그러나 닭장 얘기.  더럽게 재미없는 얘기를 하면서 진상을 떠는 여자  손님을 대하면서.  자신이 닭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뭔가 다리가 많은 벌레가 스멀스멀 등을 기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고.  아주 더러운 기분이 들면서.  나나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것을 입 밖으로  뱉어낸다.  아,  이런 씨발 년.  나나는 딱히 그 여자가 밉지는 않았지만 욕을  내뱉었다.  개 같은 년.


이순간 나는 어쩐지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 잘했어,  정나나.  

마치 세상을 향해,  갑질하는 그 누구들을 향해.  목구멍에 걸려서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게  턱,  박혀 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뜨거운 무엇을 내뱉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통쾌함 후의 미래는 더 나을 게 없다는  것.  나나의 출근은 평소와 다르지  않고.  어떤 예감도 없이 백지처럼 살아야  하고.  세계랄 것도 없는 세계,  어차피 닭장같은 이 세상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태어나서 그냥 우연히 죽을 일이고,  커다랗게 벌어진 아가리에 쑤셔 들어갈 닭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그 또한 나나의 일상이라는  것이다.  


제 9편 <소녀의 난>  


소녀의 자궁에 들어왔다가,  조각조각 갈라지는 고통을 느끼며 세상 밖으로 시체가  되어 나온 ‘난자’의 이야기이며.  말하자면 ‘나’는,  고도로 농축된 소녀였다.  


‘나’는 자궁 속의 태아(또는 난자)이다.  화자는 자궁 속에서 ‘나’  자신이기도 한 자궁의 주인 ‘소녀’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아니 관찰한다.  자궁 속에서 신호를 보내고,  감정을 드러내고,  발길질을 하고,  실재(實在)와 같은,  소녀의 거친 숨결과 희노애락의 감정을 함께  표출한다.  그러나 소녀는 그것을 모른다.  모른 척한다.  아니 모른 척하려고 애를 쓴다.


맨 처음 비린내를 풍기는 다시마 같은 ‘나’는 서서히 자궁 속에서 신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소녀에게 입덧을 하게  하고.  발길질을 하면서 살아있음을 계속  신호한다.  소녀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압류한 엄마를 경멸하고  아빠를 멸시하고,  내일이 없기를 기대하며 공부 기계 같은 친구들의  실패를 기도하는 것을 안다.  채팅을 통해서 알게 된 늙은 남자 윤에게  ‘아기를 갖게 해 줘’라며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해서 생긴 아기.  


“소녀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위험한 실험을 하듯,  도덕이라는 거,  양심이라는 거,  여문 것들이 만든 것을 하나씩 깨는 게  좋았다.  소녀에게 윤과의 만남은 분명 긍정적인  오락이었다.”(230쪽)


그러나 마침내 꼬리를 자르듯 달아나버린 윤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어렵게 윤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그의 딸  치아를 알게 되고.  불현듯 치아를 만나고.  치아가 무능한 윤을 죽이겠다고 벼르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 비밀을 공유하자며 소녀는 “살아 있는 척하고 있는 절 죽게 해 주세요”라는 소원을 빈다.  그리고는 끝내 내린 결정이 낙태  수술.  윤에게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과 뱃속의  아이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 아닌 것을 깨달은 것인가.  치아가 윤을 죽였다고 여기는  것인가.  태아의 죽음과 함께 소녀의 어떤 의욕도  반항(또는 긍정적인 오락?)도 사라져 버린다.  


소녀의 자궁 밖으로 나온 ‘나’는 소녀의 얼굴과 마주한다.  나쁜 꿈을 꾼 것 같은 소녀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울기 시작한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삶을 견뎌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체가 된 나는 소녀의 뒤를  따른다.  소녀의 그림자가 되어.


이 소설의 내용은 유난히 섬뜩했다.  ‘소녀’로 명명되는 그 또래 아이들의 생각이 발칙하면서도 공포스런 어떤 대상으로  여겨졌고.  ‘소녀의 난’으로 명명되는 자궁 속의 태아 ‘나’의 생각,  감정,  슬픔,  분노,  공포 등이 저절로 연상이 되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제 10편 <인어>  


화자 ‘한’은 한강에서 인어를 만난다.  그리고 인어로부터 ‘가서 살아남아,  물거품이 되지 않게’라는 말을 듣는다.  꿈인지,  생시인지,  죽으려고 했던 순간에 만난 어떤  것인지,  실제로 본 것인지.  한은 어쨌든 인어의 환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한은 채권 추심원이다.  채권 추심률 99퍼센트.  채권 추심원으로 매우 바람직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생의 끝을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한의 상태는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무섭게 불어나는 사채 이자처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우울은 순식간에 한을 집어삼켰다.  


장기적으로 닦달하고,  집요하게 조르고,  협박하고,  몰래 욕하는 데 달인이 된 사람들 속에 한은 속해  있다.  채무자의 아내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일에 한은  노련해졌다.  욕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상대방을 위협할 줄  알았다.  


그렇게 그가 돈을 받아냈던 채무자의 아내가 사망보험금을 주고 난 후 바로  죽고.  그의 조용한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던 신용불량자가  가족들과 동반 자살을 시도하고.  그러나 이런 끔찍한 일들을 치르고도 살아내야 하는  한은 점점 더 공포에 사로잡힌다.  


누군가를 꽉 붙잡고 싶었으나 붙잡을 사람이 없다.  막연하게 그것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앙상한 몸에 장어의 꼬리를 가진  그것.  붉고 피로한 눈동자로 한을 응시하던  그것.  인어.  물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허공 위에 반,  한강 다리 위에 반.  그렇게 양쪽에 반씩 걸쳐져  있는,  사람도 물고기도 아닌 인어와 같은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  외줄을 타는 것처럼 위태롭게 갸우뚱하며 휘청거리지만  또 그렇게 다시 균형을 잡고 살아내야 한다고 여기는 한.  

그는 어쩌면 우리네 세상 속에서 비틀비틀 한 발짝 한  발짝,  어느 불빛을 향해 어떤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서글픈 자화상 같다.  


모서리의 탄생,  이 소설집에 수록된 열 편의 단편 소설은 각각의  지옥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지옥은 세밀하게 짜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요하고 침착한 곳이며.  그래서 더욱 더 숨통을 틀어막을 수  있고.  결국에는 지쳐서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곳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은 이렇게 지옥만 있고.  이 지옥을 벗아나게 할 구원은 없는  것인지.  치유의 손길은 아득히 멀기만 한  것인지.  작가에게 되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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