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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Nov 18. 2020

회사 인간을 청산하다

워킹맘 35

결혼 초, 남편과 나는 1년간 둘이 재미나게 신혼을 즐겨보자고 약속했다. 아이를 갖기로는 했지만 당장은 급한 게 아니라 생각했다. 남편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아기를 낳아 키우자고 했지만, 나는 아이가 생기면 둘이서 재미나게 놀 수 있는 건 지금뿐이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나는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매년 근로계약을 갱신하는 상황이었기에 미래가 늘 불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먼 미래의 일로만 느껴졌다. 회사에서 늘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안달복달했었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까지도 예민하게 받아들였었다.


회사는 계약직 직원들에게 절대로 미리 다음 계약에 관련하여 언질을 주는 법이 없었고, 매번 재계약 시즌마다 계약직원들끼리의 미묘한 경쟁이 이어졌다. 누가 남을 것인가, 누가 떠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번에는 정직원이 되겠지, 계약직 중에 이번에는 누가 정직원이 되는가에만 온통 신경이 쓰이며 정신까지 너덜너덜해졌다. 정규직과 계약직이 차별받는 회사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계약직 직원들 간의 묘한 기류와 자체적인 압박감은 매우 높았다. 나의 경우에는 결혼 직후에 재계약을 하면서 고용불안에 떨었던 경험이 있던지라 정신적 압박이 상당했다.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까지 갔는데 재계약 걱정에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병가도 제대로 못쓰고 이 악물고 출근하는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었다. 미친 짓이었다.     


연 초까지만 해도 다시 1년간 재계약을 하려고 몸이 달았었는데 마침 동일한 업무로 다른 회사의 1년 계약직에 합격했다. 지금 회사와 재계약을 하면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에 지쳐버렸고 사내정치에 넌더리가 났던 참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재계약이 되었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의 위치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요즘 시대에 정직원이라 하더라도 한 회사에 정년까지 근속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몸값은 스스로 높여 더 나은 곳으로 이직하면 되는 것이다. 회사에 충성하는 인간이 되지 말고 내 능력을 개발하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남편은 내가 사서 고생하고 쓸데없이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직하겠다는 내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현실의 행복을 미루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임신으로 관심이 옮겨졌다. 계약직으로 회사생활을 하면서 임신과 출산을 하는 과정이 절대로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회사에서는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고, 차라리 이직과 함께 천천히 준비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기존 회사의 재계약을 거절하고 같은 업무의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나를 대신하여 계약하는 직원이 더 좋은 곳으로 가냐고 물었지만, 그저 빙긋이 웃어주었다.     


2019년 1월의 마지막 날에 나는 남편에게 올해 계획은 임신이라고 공표했다.






얼마 전 집 정리를 하면서 임신 전에 썼던 수첩을 발견했다. 딱 1년 전이었는데 벌써 아득하다. 그때의 나는 참 두렵고 불안이 많았다. 여전히 조급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작년의 나를 격려해주고 싶다. 그때는 너무 무서웠고 자존감이 바닥을 찍고 지하수까지 파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처절하게 괴로웠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아이의 존재 하나뿐인데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 메모를 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시간에 적응하며 살아갈 테니 지금 자신을 더 온전히 사랑하라고 위로해주고 싶다. 혹시 지금의 시간이 힘든 사람이 있다면 내가 위로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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