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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Dec 01. 2023

나혜석 수필로 보는 100년 전의 가족관 (하)

효도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왜 쏙 들어갔을까


*** 전편 <나혜석 수필로 보는 100년 전의 가족관> 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naaaong/22



그러나 부득이하나마 그들의 몸에는 살이 있고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다. 그들의 생활은 전혀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희망하는 수밖에 살 길이 바이 없었다. 오죽하여 그런 생을 계속하여 오리오마는 그들의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연애심이며, (**이것을 어서 속히 길러서 '그 덕에 호강을 해야지.' 하는 희망과 환락을 생각할 때**) 실로 그들에게는 잘 수 없고 먹을 수 없는 고통도 고통이 아니요, 양육할 번민도 없어도 구박받는 비애를 잊었으며, 궁구하는 적막이 없었다. 말하자면 자연 그대로의 하느님, 그 몸대로의 선하고 미(美)한 행복의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1인의 모(母)보다도 2인, 3인, **다수의 모(母)가 될수록 천당 생활로 화(化)하여 간다**고 할 수 있다.

(중략)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솟아오르는 정이라고들 한다. 그러면 아들이나 딸이나 평등으로 사랑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 부모의 자식에게 대하여 출생 시부터 사랑의 차별이 생기고 조건이 생기고 요구가 생길까. 아들이니 귀엽고 딸이니 천하며, 여자보다 남자를, 약자보다 강자를, 패자보다 우자(優者, 우수한 사람)를, 이런 **절대적 타산**이 생기는 것이 웬일인가. 이 사실을 보아서는 그들의 소위 솟는 정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식인 우리들에게 절대 효를 요구하여 보은하라 명령한다.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요, 죄막대어불효(罪莫大於不孝)*8라 하며 부몰(父沒)에(아버지가 돌아가시면) 3년을 무개어부지도(無改於父之道)*9라야 가위(可謂, 가히) 효라 하여 왔다.

나혜석, <모(母)된 감상기> 중에서


전편에서는 우리 사회에 무미건조한 부부관이 100년 전과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점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 자식에 대한 가치관은 어떠한가? 내 책에도 소개했던 <모 된 감상기>의 일부를 함께 살펴보자.


우리는 먼저 자식농사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야겠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식을 만드는 것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퀘스트, 살아가는 모든 의미였다. 자식이 귀해진 현재에도 자식농사라는 개념은 아주 유효하고 어쩌면 더 중요한 개념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경제 침체라는 변곡점을 맞이하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경제 성장기 때와는 달리 자식은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보며 살 수 없게 되었다. 부모보다 자식이 비슷하게 살기는커녕 확연히 가난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전근대시절 개인이 노동력을 상실했을 때 유일한 노후대책은 자식이었다. 그동안 이 이해타산적인 생각을 효도라는 이름의 미덕으로 칭송하며 감추어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서 효도라는 말이 쏙 들어가 버렸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말대신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효도라는 말이 무색해지며 부모를 향해서까지도 이해타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물론 효도는 꼭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나름 입신양명을 하여 자랑할 수 있는 자식이 되거나, 아니면 그저 건강한 몸으로 결혼을 하여 손주를 낳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또한 효도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그렇게 효도라는 말은 정말로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치 피상적으로는 효도라는 말도 없어지고,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도 없어져 보인다. 어찌 보면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100년 전에 비해 상당히 변한 듯 느껴진다. 그런데 천천히 곱씹어보자. 예나 지금이나 자식에 대해 이해타산적인 근본적인 가치관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이유는 바꿔 생각해 보면 딸에게도 아들과 다름없는 보은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딸도 아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았고 비슷한 경제력을 갖출 수 있어 딸을 차별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오히려 예전에 며느리에게 당연히 기대했던 노후의 수발 문제를 이제는 딸에게 기대하며 딸을 더 선호한다는 이야기는 못내 씁쓸하기까지 하다.


이런 이해타산적인 자식에 대한 가치관을 달라진 시대에도 버리지 못해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저출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이를 사치재 취급한다는 말인즉슨 아이를 낳으면 키우는데 막대한 비용만 들어가고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굉장히 극단적인 가족관에 대해 적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가족에 대한 낡은 가치관의 잔재와 강산이 열 번 바뀔만큼 달라진 사회가 극심하게 충돌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본다. 그게 단순한 충돌의 양상이 아닌, 소멸로 향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작금의 저출산 현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런 이해타산적인 가족관에서 입은 개인들의 내면의 상처라고 본다. 어쩌면 우리가 옛날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게 된 이유는 가족에 대한 각자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가족이 개인의 삶에,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매우 강력하다.


나혜석이 언급한 자식에 대한 솟는 정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또 부부사이를 아껴주려고 노력하는 가족들도 많이 존재한다. 결국 우리 사회의 행복을 넘어 존폐의 기로까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 해체를 논하기보다 가족의 본질을 더욱 더 고찰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힘도, 세상을 파괴하는 힘까지도 솟는 사랑에서 비롯되는걸 이 소멸을 바라보는 사회가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이 모든 걸 구할 수 있는 말은 소설이나 만화에나 나올 법한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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