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아옹 Nov 28. 2023

나혜석 수필로 보는 100년 전의 가족관 (상)

100년 전의 부부의 세계


나혜석은 세간의 오해를 아주 많이 산 사람이다. 적어도 내 책 원고작업을 하며 그녀의 수필을 쭉 읽어본 내 결론은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사람인 나혜석은 문학적, 미술적 재능을 평가받았지만 우리나라 최초 페미니스트, 최초로 법적 절차를 밟고 이혼한 여자라는 타이틀로 유명하다. 거기에 불륜으로 시끄러웠던 사생활도 한몫했을터. 당연히 그녀의 도덕적인 잘못도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완벽함을 아주 쉽게 기대한다. 물론 그녀도 그랬기에 그런 글들을 쓰고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터.


아무튼 그녀가 살던 100년 전에는 전통적인 사상에 배척된다는 이유로, 현재는 혐오로 점철된 이데올로기에 그녀의 성찰은 가려져있어 보였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 지금 이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그 의미가 안타까울 정도라, 내 책에도 나혜석의 이야기를 언급하기까지 했다.


나혜석이 쓴 가장 유명한 문장은  “자식은 모체의 살을 좀먹는 악마다” 일 것이다. 나도 그 문장에 이끌려 나혜석의 수필을 열심히 찾아서 읽어보았다. 사람은 본디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한다. 그건 요즘 사람들이 전자기기에 익숙해 문해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100년 전에도 그랬던걸 보니 그냥 인간 인지의 구조의 속성인 듯싶다.


외교관이었던 그녀의 남편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서 지내며 프랑스 가족생활에 대해 관찰하고 적은 글들을 보자. 나혜석은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모습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족관을 비교해 보며 적고 있다.


이 집주인은 오십여 세가 되었으나 부부 사이는 삼시기(三時期)가 있다 한다. 청년기에는 정으로 살고, 중년기예는 예로 살고, 노년기에는 의로 산다고 한다. 이 부부는 의로 살 시기건만 정으로 산다.

나혜석, <주부의 권위> 중에서


남편은 늘 부인의 낯을 엿보아 기쁘게만 해주고 입 맞추기, 레스토랑 가기며 연극장 가기, 지방 연설하러 가면 동반하여 가기, 일시라도 떨어지는 일이 없다. 아이들은 오히려 따로 돈다.

나혜석, <주부의 권위> 중에서


이 수필 제목이 <주부의 권위>인 이유부터 소개해야겠다. 남편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서 지내게 된 나혜석은 그 집을 관찰하고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이 글은 “ 어느 나라든지 중류, 상류층의 점잖은 집안은 남자가 내정에 간섭치 않는 것이 상례이다. 이 집도 그러하며 주부의 권위가 절대로 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혜석은 집주인 아주머니가 자식을 엄히 꾸짖는데 그 옆에서 남편이 눈치를 보며 살살 말리는 장면을 보고, 이 모습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똑같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듯하다.


나혜석이 프랑스인들의 가족생활과 우리 가족생활과 다르다고 느낀 결정적인 차이는 부부의 모습이다. 유럽인 부부들이 대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사이가 정다워 보이는 모습이 아주 생경해 보인 듯하다. 나혜석은 그 글의 마지막에 그들의 속사정은 일일이 알 수 없지만, 밖에서 볼 때만큼은 부부가 서로에게 충실하고 아끼는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덧붙인다.



100년 후의 사람인 나는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이게 과연 100년 전의 모습일 뿐인가? 지금 당장의 우리네 모습에 대입해도 뭐가 다를까 싶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우리는 여전히 젊었을 때는 정으로 살고, 아이를 낳은 이후에는 예로 살고, 노년기에는 의로 산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면 이제는 이혼을 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의와 예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갈라서기도 한다.


아무튼 남 앞에서 부부간 사이가 좋아 보이면 이상한 것에 가깝다. 우리 부부는 그저 가족일 뿐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 남매와 같다. 가족끼리 남사스럽게 어떻게 그런 걸 하나? 이런 말들을 남 앞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중년 이후에 손을 꼭 잡고 놀러 다니는 다정한 부부는 불륜이겠거니 오해받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들이 정말로 부부라면 대개 보이는 반응은 부러움을 억누르는 경악에 가깝지 않은가?



왜 우리는 아직도 부부사이에서 만큼은 이런 난센스가 더 자연스러울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무정한 부부사이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식에게 의미를 찾다못해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가족 비극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걸 유교문화 탓을 할 수 있고, 다른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나는 21세기에 와서 무슨 탓을 하고 원인을 밝혀내는 건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것보다 우리는 이런 가치관이 100년 전과 별로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과 달리, 가족에 대한 가치관은 재미있게도 좀처럼 변하기 힘든 성질을 많이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가족에 대한 가치관은 보통 아주 보수적인 성격을 띤다. 가족이라는 존재 자체가 말 그대로 지켜야 하는 보수적 성질에서 기인한 점이 그 원인일 것으로 추측한다.


꼭 부부에 대한 가치관뿐만이 아니다. 자식에 대한 가치관은 더 흥미롭다. 모순적인 부부관과 함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으며 그게 바로 작금의 저출산의 원인과 연결된다. 왜 우리나라가 초저출산의 지경에 이르렀는지 나혜석의 다른 수필들을 보면 수긍이 간다.


나는 여러모로 그의 통찰력에 감탄했는데 왜 이런 건 주목받지 않고 있을까? 인구소멸을 걱정하는 100년 후의 사람들은 엉뚱하게 어미의 살을 뜯어먹는다는 표현을 마치 자식을 낳지 말라는 듯이 이해하며, 다른 편향된 시각으로는 모성을 저버린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내 책에도 적은 대로 그분이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오게 말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는 걸로 하자. 이번 편과 함께 2부작이면 깔끔하게 끝날 이야기다.





이전 03화 자식은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인가 (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