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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생일 선물로 찐빵을 해달라고 했다.

"앗 추워"


강원도 태기산 자락의 1월.

살을 에는 추위에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외풍이 시베리아처럼 몰아쳐 온다. 한기를 느끼며 이불 깔린 뜨끈한 아랫목에 발을 쑥 집어넣었다가 발밑에 따뜻한 뭔가가 부딪치며 흠칫 놀랐다.


"뭐지?"

호기심에 이불 속을 들춰 보았더니 스테인리스에 천과 비닐을 덮어씌운 뭔가가 있다. 살짝 코를 들이대니 쿰쿰한 술 냄새가 난다.


"엄마, 아랫목에 이거 뭐예요?"

"반죽이지 찐빵 반죽"

"찐빵 반죽? 이걸로 찐빵을 만들어요?"

"그럼, 오늘 막내 아가 생일이잖아. 뭐 먹고 싶은가 물어보니 찐빵이 먹고 싶다고 해서 반죽 익히는 거야"


우리 집 막내는 별칭이 아가다. 4녀 중 막내로 태어나서인지, 아가처럼 귀여워서인지 늘 아가라 불리며 사랑을 받았다. 막내가 가장 좋아한 간식은 찐빵이다. 부모님이 농사지은 팥을 가마솥에 푹푹~ 삶아 설탕, 소금을 넣고 방망이로 으깨어 만든 팥소가 들어간 달콤한 찐빵. 40여 년 전 우리는 시중에 파는 부드러운 호빵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저 약간 거친 반죽 맛의 엄마가 만들어 준 찐빵만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찐빵은 강원도 그 유명한 안흥찐빵을 닮았다. 부모님이 결혼 후 먹고살 일이 막막했을 때 시작한 찐빵 장사가 제법 잘 됐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이야기다 보니 가게라고 있었겠는가? 집에서 만들어 함지박에 이고 나가 팔았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친구 따라 얻게 된 탄광촌 일로 엄마는 찐빵 장사를 접어야 했는데, 매우 아쉬웠다고 한다. 그 이후 엄마의 찐빵 단골손님은 딸들이었다.


한겨울 설 전이 막내 아가 생일이다. 강원도 엄동설한에 어딜 간다는 건 엄두도 나지 않는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외풍을 피해 뜨끈한 아랫목 방구석과 혼연일치가 되는 것이 유일한 취미다. 그러다 눈이 2일이고 3일이고 쏟아지고 나면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장갑으로 중무장한다. 감기 조심하라는 엄마의 외침은 귀에 들리는 둥 마는 둥 무릎 푹푹 빠져가며 동네 아이들 모인 눈썰매장으로 향한다. 한쪽엔 이미 장작으로 불이 피워져 있고 아이들은 비료 포대를 손에 들고 울퉁불퉁 눈썰매를 탄다. 경사진 밭에 쌓인 눈으로 만들어진 눈썰매장은 하루 12시간 몇 날 며칠을 타도 공짜다. 눈썰매를 타다가 손발이 꽁꽁 얼면 삼삼오오 모닥불에 모여 불멍을 하며 까르르 웃음이 자지러진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고 썰매를 타다 보면 강원도 시골 마을의 겨울방학은 그렇게 흘러 설이 다가오고, 막내 아가의 생일을 맞이한다.


엄마는 빵빵하게 부푼 반죽을 들춰보며 다 되었다며 꺼낸다.

준비한 팥소를 가져다 놓고 면포를 깐 찜통을 준비한다.

기름을 손에 발라가며 질척한 반죽을 떼어 손에 올려놓고 팥소를 한 숟가락 올린다.

펼친 반죽에 팥소를 재빠르게 감싸며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빚어 찜기 위에 살포시 담는다.

김이 차오른 떡시루에 찜기를 걸쳐놓고 뚜껑을 덮어 익을 때까지 찐다.


지금부터는 시계를 껴안고 시간이 가기를 독촉하기 시작한다. 엄마에게 찐빵이 언제 익냐고 호들갑을 떨며 애써 태연한 척한다. 어느새 내 생일인지 막내 생일인지 잊었다. 아기 피부처럼 몽글몽글한 반죽이 어떻게 변신할지 궁금하여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시루 옆을 지키고 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찐빵과 함께 먹는다며 김장독에서 동치미 꺼내오랴, 불 조절하랴 분주하다.


찐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아이들과 12시간씩 공짜 눈썰매를 타고 온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찜이 퓨우~~~ 하고 올라오기를 한참 드디어 엄마 손에 뜨거운 찐빵이 들려있다. 조심스레 양손으로 찐빵의 가운데를 쩍 벌려본다. 가운데가 홍해 바다 가르듯 갈라진 그 순간 거무죽죽한 팥소가 보이고, 차 있던 김이 훅 올라온다. 한입 떼어 먹어보던 엄마는 흡족한지 잘 익었다며 불을 끈다. 그리곤 찐빵을 나와 막내 아가의 손에 하나씩 올려준다.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앗 뜨거워"

우린 흠칫 놀라 접시에 찐빵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러면 엄마는 다시금 찐빵을 들고 한쪽을 떼어 호호 불고는 우리 입에 넣어준다.


달콤한 팥소가 혀에 엉겨 붙으며 쩝쩝 소리를 내게 되고 부드러운 빵은 어느새 목구멍에 넘어가 있다.

쿰쿰하던 막걸리 냄새는 센 불에 도망갔는지 그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찐빵을 맛본 우린 앉은자리에서 4~5개를 해치운다. 허겁지겁 먹는 게 걱정이 되는지 엄마는 무를 썰어 넣은 동치미를 한 숟가락씩 떠 넣으라며 그릇을 밀어준다.


막내 아가는 생일날 받은 찐빵에 행복해하며 세상 부러운 것이 없는 표정을 하고 나와 아랫목에 앉아 tv를 보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찐빵의 추억과 함께 막내 아가의 추운 겨울 생일은 넘어간다.


친정엄마가 천국으로 돌아가시고 몇 년 후, 막내가 친절한 제부를 만나 결혼하여 임신했다.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언니가 사주겠다고 했더니 그 찐빵과 감자전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 안타깝게도 감자전은 나와 언니들이 해줄 수 있는데 그 찐빵은 복원 불가다. 엄마가 만드는 걸 본 친정아버지는 별거 아니라고, 막걸리 넣고 휘휘 저어 발효하면 된다는데... 얼마나 계량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호두까지 넣어가며 시도 해봤지만 엄마가 만들어 준 그 찐빵 맛은 아니다. 그나마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찐빵이 친정 가는 길 안흥에 있다. 그래서 우린 가끔 엄마의 맛을 찾아 안흥에 들려 상자째 찐빵을 사들고 온다.


따끈한 찐빵의 온기를 가슴에 품으며 추억을 한가득 안고서야 말이다.


덧: 이 글이 떠오른 건 브런치 구독자이신 까나리님의 글을 읽다가 떠올라 썼습니다.

까나리 작가님 귀한 글감 감사합니다^^ 까나리 작가님의 글이 궁금하다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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