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김치는 담백하고 시원한 맛
나는 오랫동안 엄마의 강원도 김치를 먹고 자랐다. 친정이 있는 강원도 영서 지역의 김치는 특징이랄 것도 없지만 바닷가 쪽과 거리가 멀기에 담백하고 시원한 맛의 김치다. 젓갈은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가격도 비쌌기에 소량만 사용했다. 그나마 김장철이면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이까(오징어)를 길쭉하게 썰어 무채와 함께 만든 무채 김치가 바다향을 가득 담은 맛이라 겨울이면 엄마가 담근 무채 김치가 그립다. 해산물이 귀한 시절이기에 무채 김치에 들어간 오징어를 쏙쏙 빼먹는 재미도 있었다. 그렇게 담백하고 시원한 강원도 김치를 먹고 자란 나는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맛의 김장김치를 만나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고향이 전라도다. 바다가 가까운 강진이니 젓갈 듬뿍 넣은 김치가 익숙할 테다. 시어머니가 만든 김장을 밥상에서 영접하고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떤 젓갈을 쓰셨는지 모를 냄새가 온 밥상과 집안에 가득했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다"를 거듭하며 김치를 먹었고, 친정김치는 왠지 심심하다고 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코를 잡고 비틀 만큼 강했던 젓갈 냄새에 짠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는 말로 남편을 설득했고, 어느새 강원도 김치에 익숙해져 가는 남편도 어머님이 김치를 담글라 치면 젓갈을 조금 넣으시라고 계속 주문을 한다. 자식들의 짜다는 성화에 어머니의 김치에서 나는 강한 젓갈 냄새가 조금씩 사그라들 즈음 사돈어른의 김치를 먹어보게 되었다.
친정에 오면 제부는 김치가 영 맛이 나지 않는다며 잘 먹지 않았다. 이유인즉 내 엄마(사돈어른의)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열변을 토한다. '장모의 김장독 김치 맛을 못 봤으니 그럴 테지...'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 번은 내게 김장을 한통 주며 먹어보라고 했다. 때마침 우린 이사를 했기에 김장할 엄두도 나지 않아, 안겨다 주는 김치가 그저 반갑기만 한 마음에 덥석 받아 들었다. 손이 큰 제부는 파절이와 무수지(총각김치)도 먹어보라며 후하게 인심을 나눠주었다.
제부의 선심에 우린 기쁘게 김치를 꺼내어 식사를 했다. 지금껏 먹던 강원도 김장김치와 달리 고춧가루 양념도 좀 많았기에 비주얼은 좀 남다르다 생각했지만 한입 베어 물고는 "오!" 짧게 감탄을 했다. 내 입맛이 혹시라도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조금 더 먹어봐야겠다는 마음에 하나씩 먹던 김치는 어느새 한 접시를 모두 비웠고, 많다며 덜어 놓은 김치도 마저 가져와 밥솥을 긁어가며 김치를 먹었다. 밥을 먹기 위해 김치를 먹는 건지, 김치를 먹기 위해 밥을 먹는 건지 신기할 정도로 김치는 맛있었다.
사돈어른 김치에 숨은 밥도둑 파헤치기
나는 동생에게 물었다.
"너희 시어머님은 어디 김치야"
전라도 김치라고 했다. 내가 아는 전라도 김치는 결혼하고 처음 맛본 시어머니가 담근 젓갈 내 강한 그 맛인데, 사돈어른의 김치는 젓갈 냄새가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원한 맛까지 났다. 어릴 적 엄마가 김장독에서 막 꺼내어 준 그 시원한 맛이었다. 하지만 분명 강원도 김치와는 차이가 있었다. 소금에 절여져 푹 사그라든 흔한 김치가 아니었다. 줄기부터 잎까지 씹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삭아삭했다. 적당히 익은 후엔 새콤한 요구르트의 느낌이 날 정도로 맛이 좋았다. 그렇다고 달지는 않았지만 씹을수록 단맛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맛이다.
사돈어른의 김치는 찌개를 끓였을 때도 일품이었다. 한 번은 남편 친구들이 집들이를 왔는데 해장할 아침으로 무얼 할지 고민하다 돼지고기 듬뿍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간밤에 한잔 한 취기도 있었지만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떠 넣고는 연신 "캬!!"를 외치는 친구들의 외침에 한솥 김치찌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두들 제수씨 음식 솜씨가 좋다고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사실은 사돈어른의 김치 맛에서 우러난 양념 맛이 시원하고 알싸하니 구수한 김치찌개를 연출해 낸 것이다. 남편의 친구들은 아침밥임에도 밥그릇을 싹싹 긁어가며, 아니 밥이 더 갖다 먹으며 얼큰한 해장을 했다.
삼 년을 그렇게 제부가 선물해 주는 사돈어른의 김치를 먹고 보니, 레시피가 궁금했다. 동생에게 곧 김장을 할 거라며 살짝 물었다.
"사돈어른은 김장하실 때 뭘 넣어? 레시피 좀 알려주라."
"뭐, 보통 김장할 때 넣는 거 다 넣으시지 뭐. 좀 다른 거는 육수를 끓이시더라고"
오호라, 육수를 끓이신다니... 그것이 비법인가 보다. 김장 담그는 비법을 궁금해하는 내 심정을 어찌 알았는지 제부는 김장 때 와서 같이 하자고 했다. 김치도 같이 버무리고, 김장 배워서 나중에 해달라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이다. 제부는 입맛이 예민하다. 맛있는 맛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맛집이라면 찾아다닐 정도로 맛을 즐긴다. 이런 제부가 내 김치를 달라할 사람은 아니지만 이참에 배워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김장을 함께 담그기 시작한 것이 어언 3년이다.
3년간 사돈어른과 함께 김장을 하며 나름 비법이 뭘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없었기에 뭐가 들어가는지 조차 몰랐는데 함께 만들며 깨달은 것은 역시 까다로운 재료 선정과 정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돈어른이 김치에 숨겨놓은 밥도둑은 정성이다
김장을 준비하시는 정성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다. TV에서나 나올법한 장인정신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김장을 하시기 3~4주 전쯤 되면 강경으로 내려가 멸치액젓과 새우젓갈을 손수 구입하신다. 흔히 젓갈은 별반 차이 없다 생각하겠지만, 며느리도 모를 좋은 젓갈을 공수해 오신다. 김장을 하기 전 첫행보가 젓갈 구입하는 일이다. 귀찮고 힘들기도 하겠건만 매년 해오신 수고다.
채소 재료구입은 가락동 시장에 직접 가셔서 배추를 먹어보고 사신다. 배추를 뜯어 직접 먹어보고 단맛이 있는지 감정하며 배추를 구입한다. 알타리는 40일 무를 사신다고 했다. 황토밭에서 40일 자란 무는 정말 연하고 맛이 있다. 이렇게 배추, 무, 갓, 쪽파, 대파 등 재료를 꼼꼼히 살피며 가장 좋은 것으로 구입한다.
김치 재료 중 김치 비주얼과 맛을 한껏 끌어올려주는 고춧가루는 친정아버지가 직접 농사지은 태양초 고춧가루를 쓴다. 친정아버지의 정성이 들어간 고춧가루는 바알 간 빛깔과 적당히 매운 것이 일품이다. 아버지는 가장 좋은 고춧가루는 3번째 딴 고추라고 했다. 이것만큼은 딸들 준다고 그 어디에도 팔지 않는다. 아버지가 농사지으신 고춧가루는 대부분 동생네 집에서 모두 사간다.
아파트에서 배추를 직접 절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사돈어른은 내게 신신당부하신다. 절임배추 사지 말라고, 푹 절여져 오면 배추즙이 모두 빠져나간다고 말이다. 우린 배추를 해마다 심고 있으니, 농사기술이 조금 나아지면 우리 먹을 김장 배추는 수급이 가능할 것 같다. 배추를 절일 때는 푹 절이지 않는다. 절인 배추를 여러 번 씻어서 채반에 물기를 빼둘라치면 양념 만드는 사이 배추가 살아난다. 우리는 매년 이과정을 보며 배추가 또 살아난다고 걱정을 하면서도 언제나 아삭하고 맛있는 김치에 온갖 시름 잊는다.
마지막 밥도둑 조건은 양념을 버무릴 육수다. 큰 들통에 물을 붓고 북어를 넣고 하루를 푹 고아내신다. 식은 육수는 김장 속 버무릴 때 넣어 함께 무친다.
올해도 동생네 집에서 함께 김장을 했다. 배추가 실해서 김장 양이 많다. 넉넉히 가져온 김치를 김장 못한 분들에게 김치 두 포기, 파김치, 총각김치를 선물했더니 세상 귀한 김치를 나누어 주었다고 무척 고마워한다. 나는 매년 이렇게 사돈어른의 김치를 나눠먹는데, 하나같이 이구동성 말한다.
"어쩜 김치가 그렇게 맛있어요. 아삭하고 시원하니 밥 두 그릇 뚝딱 비웠어요"
그분들은 모를 거다. 김치 속에 밥도둑이 숨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부 덕분에 매년 맛있는 김장을 먹게되어 참 감사하다!!
톰 소여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문예 클럽 로터스에서 정찬 참석자들에게 책이름을 본뜬 요리를 제공했는데 그 일화가 유명해서 뉴욕타임스지에 실리기도 했다. 만약 마크 트웨인이 한국인이라면, 사돈어른의 김치에 어떤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나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빌려 사돈어른의 김치에 한 문장을 선사하고 싶다.
'음식에 대한 사랑처럼 진실된 사랑은 없다.'
사돈어른의 김치에 담긴 밥도둑은 자식을 먹이고자 수고도 아끼지 않았던 바로 '사랑'이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