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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 Sep 18. 2024

여기가 캄보디아야?

세 살 아이를 두고 해외파견 간 엄마 이야기

엄마 해외파견 다녀올게


9. 여기가 캄보디아야?


2023년 11월 29일 밤, 나는 프놈펜 국제공항 앞에 서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입국장 앞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나는 이리저리 기웃기웃 발돋움을 해가며 들어오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비행기는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았다. 아이가 오는 날이었다.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온 후 거의 다섯 달 만이었다. 8월쯤 일찌감치 캄보디아행 항공권을 예약해 놓았고, 아이를 기다리면서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벌써 한 주가 다 지나갔네." 금요일이 되면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 매번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아이가 오는 시간만은 아무리 해도 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통화할 때마다 양 손가락을 활짝 펴고 이렇게 물었다.


"엄마, 이 만큼 자면 엄마한테 갈 수 있어?"


손가락 열 개를 다 펼쳐도 턱없이 부족한,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아이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 기다림을 가만히 헤아려보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내가 아이만 한 나이였을 때 아빠와 떨어져 살았던 적이 있었다. 시골 할머니댁에서 함께 지내던 우리 식구는 농사로는 생활이 녹록지 않아 아빠 혼자 서울로 일 년 남짓 돈을 벌러 떠났다. 나는 매일매일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물었다. "아빠는 언제 와?" 엄마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매일 다음날이 되면 똑같이 아빠가 언제 오는지 묻고 또 물었던 것은 생각난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어린 날을 떠올려본다.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지 못하는 시절의 기다림은 영원과도 같았다.


이제 나의 기다림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내가 가는 모든 곳은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답사가 되었다. 프놈펜과 씨엠립에는 아이를 데리고 갈만한 곳들이 좀 있었다. 놀이터와 장난감이 있는 카페, 아이가 좋아할 것 같은 음식을 파는 식당, 같이 묵기에 좋은 호텔들을 검색해 보고 주말이면 미리 가보기도 했다. 집의 가구배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수시로 구상해 보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다녔다. 아이가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게 소파를 침대 쪽으로 옮길까, 모기장을 설치해야겠지,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이나 읽을 책들을 미리 사놓을까,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을까 등등.




시간은 흘러 어느덧 11월이 되었다. 출장과 회의가 반복되는 빡빡한 업무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틈틈이 친정엄마와 아이를 위한 비자발급을 받고, 여행 중 묵을 호텔과 이동할 차량을 예약하고, 본격적으로 여행지와 식당, 카페들을 찾아봤다. 결국 아이를 만나기 이틀 전, 몸살이 왔다. 전화조차 받지 못할 만큼 기력이 떨어졌다. 꼬박 하루를 앓고, 미처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프놈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공항까지는 8시간이 걸렸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최대한 바른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어서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신기하게도 프놈펜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아이는 친정엄마가 데리고 왔다. 그동안 엄마는 무릎수술과 재활을 마치고 많이 좋아져 있었다. 다만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공항의 입국절차를 잘 통과하실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입국카드 쓰는 법도 자세히 알려줬고, 미리 비자도 받아놓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걱정도 커졌다. 아이가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방방 뛰며 좋아할까? 어색해할까? 얼마나 많이 컸을까? 비행기 안에서 불편하다고 울지는 않았을까? 사람들이 하나둘 나올 때마다 목을 빼고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찾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우리가 드디어 다시 만났을 때, 아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방방 뛴 사람은 나였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호들갑스럽게 끌어안았다. 오동통한 작은 몸이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사진으로 볼 때마다 너무 무럭무럭 크는 것 같아서 서운했는데, 조그맣고 보들보들한 아이의 볼을 매만지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 여기가 캄보디아야?”


아이는 엄마가 캄보디아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캄보디아가 뭔지는 아직 몰랐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묵은 호텔에서 “응, 여기가 캄보디아야.”라고 대답했더니, 다음날 프놈펜 시내를 돌아다니다 덥고 힘이 들었는지 ‘캄보디아’로 가자고 졸라댔다. 아직 나라의 개념이 없던 아이는 프놈펜과 씨엠립을 거쳐오면서 자기 마음에 드는 곳이 캄보디아가 됐고, 나중에는 내가 사는 숙소가 ‘캄보디아’가 되었다. “여기가 엄마 캄보디아야?”라고 묻는 아이에게, “여기도 캄보디아고, 어제 갔던 곳도 캄보디아야.”라고 말해주면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조금씩 캄보디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아이가 일정한 환경 속에서 매일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또한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아이와의 캄보디아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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