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오후

by 나작

책을 읽는다. 왼 손 위에 올려진 두툼한 종이책의 무게, 오른 손의 손가락들 사이로 사락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는 검은 글자들, 코끝으로 풍겨오는 마른 펄프 냄새... 그러나 책을 읽는 순간에는 느끼지 못한다.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환영 속에 머물고 있기에.


무엇을 읽었는지, 책에서 빠져나온 후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때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글자들을 다시 주워모아 종이 위에 뿌려 놓는다. 글자들이 흩어졌다가 제각각 모여든다. 그러나 여전히 자리잡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잡아 들고 헤매다닌다. 거대한 퍼즐 속이다. 퍼즐에는 있어야 할 꼭 맞는 자리가 있다.


글자들의 행렬이 꿈틀거리며 자리를 찾아간다. 너무 느리다. 내가 모르는 만큼 느리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고, 또 다음날이 된다. 어떤 것은 사라져간다. 긴 꼬리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허공에 허우적거리던 손에 책 한권이 다시 들린다. 책장이 사락사락 넘어간다.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어한다. 글자를 늘어놓은 자들이 다녀간 곳에, 나도 닿고 싶다.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나갔다. 책상 위에 책이 놓인다. 네모난 물체 위에 그림들이 흘러간다. 여기가 내가 있던 자리다.


나는 불안하다.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것은 누구일까. 나일까, 글자들일까, 글자들로 장난을 친 작자들일까. 더이상은 갈 곳이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가버렸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이사를 준비해야할 때가 되었다. 필요없는 짐들을 버리고, 책들을 정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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