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여덟 개에 오백원

by 나작

운전석에 앉아 시동버튼을 누르고, 안전벨트를 길게 빼내어 고정한 후에, 라디오를 켠다. 102.3MH, EBS 제2 FM.


낮 열두 시의 라디오는 어느 주파수를 맞추어도 시끌벅적하기 마련이다. 철 지난 댄스음악과 다소 격양된 DJ들의 목소리는 4시 무렵까지 한낮의 무료함과 피로함을 잊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EBS는 그에 비해 차분한 편이다. ‘EBS 윤고은의 북카페’는 책을 소개하고, 책의 본문을 읽어주는, 다소 졸음이 올 것만 같은 구성에도 윤고은 작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 덕분에 생기를 유지한다. 책 얘기라면 오히려 흥미가 자극되는 나로서는, 한낮에 운전하며 듣기에 딱 좋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이면 북카페를 듣는다. 열두 시에 출발하면 오전 근무자와 교대하기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다. 매일 듣지는 못한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만 근무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읽기의 기쁨’ 코너에서 읽어 준 책은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중 옥수수에 대한 글이었다. 옥수수가 얼마나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기이한 식물인지,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높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생활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읽기는 ‘신이 옥수수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마야인들의 신화로 마무리되었고, 김창완의 ‘옥수수 두 개에 이천 원’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짙은 녹색이 울창한 산 아래를 달리면서, 활엽수들이 얽혀있는, 울퉁불퉁 구불구불한,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옛 산길을 떠올린다. 루앙프라방을 처음 여행하고,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인 ‘팍세’로 돌아가야 할 때, 나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버스비를 남기고 나니, 여유 돈은 5천 킵(당시 원화로 500원) 정도였다. 전날 50달러짜리 호텔이 아니라 평소처럼 10달러짜리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더라면 훨씬 여유로웠을 것이다. 아침 조식을 든든히 먹었지만, 나는 곧 스무 시간 가까이 로컬 버스를 타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가는 길의 반은 쉬지 않고 구불거리는 산길이었다.


마침, 옥수수철이었다. 몽족 시장 앞 도로변엔 지나가는 차들이 날리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앉아 옥수수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닐봉지에는 잘 삶아진 옥수수들이 여덟개씩 담겨 있었다. 한 봉지에 딱 5천 킵이었다. 마지막 남은 돈으로 옥수수 한 봉지를 샀다. 열 시간가량 빙글빙글 산을 내려와 비엔티안에서 팍세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는 가다가 길가에서 아무나 손을 흔들면 세워서 태워주고, 아무 데서나 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면 멈춰주었다. 금방 부서질 것 같은, 에어컨도 없는 버스에서 쿠션이 다 꺼진 의자에 열두 시간을 더 앉아 있었다. 옥수수를 하나씩 아껴 먹으며, 길고 험한 여정을 견뎠다.


십수 년 전, 루앙프라방에서는 옥수수가 여덟 개에 오백 원이었다.


지금은 라오스에서 QR코드로 계좌이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루앙프라방까지 기차를 타고 2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요즘 똑똑한 젊은 여행자들은 나처럼 무모하게 돈을 쓰지도 않을 거다.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차의 편안한 시트에 앉아, 잘 닦인 도로를 달리면서 정말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그때를 떠올리면서, 책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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