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로운(?) 이사

지방에서 전셋집을 보러 다닌 오늘이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거야.

by 나작

제발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부동산 중개인을 만났다. 벌써 세 번째 같은 아파트에서 만난다. 이 동네에서 유일한 신축(?) 아파트단지다. 다들 다른 구축 아파트나 빌라는 너무 오래돼서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아파트는 5년 전 준공 됐다. 새로이 철도역이 개통되는 호재에 힘입어 투자목적으로 분양받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집값이 분양가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그 덕에 전세가도 조금은 낮아져서 우리로서는 다행이었지만, 어쨌든 전혀 계획에 없던 동네로 이사 오는 것 자체의 부담은 있었다.


주차를 하고 내리자마자 무자비한 태양빛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도 모르게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보는 집은 18층이었고, 34평이었다. 전세가는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같았다. 지금 살고 있는 27평 집도 세 식구가 살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기에, 34평까지는 굳이 필요 없었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도 없다.


8월 초에 이 동네에 어떤 집이 있나 둘러보고 싶어서 부동산 투어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지금 연락하는 공인중개사를 통해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평수의 집을 봤었다. 2층이었고, 30평이었다. 남자들이 기숙사로 쓰면서 관리가 안된 집이긴 했지만 청소만 잘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사 날짜가 불투명한 상황이라 확답을 주지 못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매물로 나와 있었고, 집주인은 집이 팔리지 않으면 전세금을 주기 어렵다고 했다. 올봄에 처음 집주인이 집을 팔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우리의 전세계약은 가을이면 만료가 됐다. 벌써 몇 달째 집이 팔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계약만료일자가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어쩐 일인지, 2주 후에 집이 팔렸다. 나는 기존에 봤던 2층 집 매물이 아직 가능한지 물었다. “아직 가능합니다.”라는 안내에 한 번만 더 보고 계약을 진행하려고 마음먹었다. 이번엔 여섯 살 딸과 친정엄마까지 함께 갔다. 딸은 집을 보자마자 “2층 싫어!”하고 부루퉁해졌다. 창 밖은 주차장뷰였다. 그래도 전세금액이 싸고 구조와 크기도 마음에 들어서 계약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주변에 편의점, 베이커리, 카페, 식당, 그리고 어린이집과 학교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이곳에 사는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이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알아봐야겠다. 마트랑 다이소는 가까운가 모르겠네.


그때 전화가 왔다. 중개사였다. 집주인이 직접 들어와서 살겠다고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황당했지만 곧 “같은 가격, 같은 평수에 8층 집이 하나 더 있네요. 보실래요?”라는 말에 다시 차를 돌려 아파트로 향했다.


8층 집은 준공 이후 아무도 살지 않은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직 곳곳에 비닐도 다 벗기지 않은 상태였다. 5년 동안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데 고생은 하겠지만, 탁 트인 전망이 마음에 쏙 들었다. 딸도 이곳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높은 데가 좋아!” “높다고 다 좋은 건 아니야. 그래도 전망이 참 좋다.” 더 볼 필요도 없었다. 계약하겠다고 했다.


“임대인이 법인이라서 보증보험가입이나 대출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확인해보셔야 해요.”


나는 “아마 괜찮을 거예요.”라는 중개사의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알아보고 곧 연락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대출조건이나 보증보험 조건이 은근히 까다로웠고, 인터넷이나 전화로 알아보는 것과 실제 은행에서 이야기하는 것 등이 조금씩 달랐다. 몇 군데 방문 상담하다 보니 며칠이 소요됐다. 4일째 되는 날 드디어 (조건 상으로) 대출이나 보증보험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해준 은행이 나타났다. “저희 계약할게요. “라고 메시지를 보내니, 바로 전화가 왔다.


“어쩌죠. 바로 직전에 다른 부동산에서 그 집을 보여줬는데 바로 계약금을 입금한다고 했다네요.”


아니, 5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던 집이 하필이면 내가 계약하려는 그 순간에 나갔다고?! 그렇게 황망하게 8층 집을 새치기(?) 당하고 부랴부랴 다른 집을 더 소개받았는데 전부 더 비싸고 더 넓은 집들뿐이었다. 중개사는 당근까지 뒤져가며 매물을 찾아주었지만 벌써 계약이 끝난 집, 전세금을 갑자기 올리겠다는 집, 이사날짜를 절대로 조정해 줄 수 없다는 집 등등 다양했다. 실망감과 당혹감에 그날 하루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재정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그동안 얼마나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살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계약할 때, 4년 후에 그때보다 더 돈이 없는 상태에서, 심지어 이렇게 낯설고 외진 곳으로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줄은 몰랐다. 지금 내가 글이나 쓰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싶어서 다시 채용공고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지원서를 넣어볼까, 몇 군데 공고를 읽다 보니, 행복하지 않은 내 모습이 훤하게 그려졌다. 배수의 진을 치자. 나는 채용공고 사이트를 껐고, 며칠 전 이메일과 메시지로 온 통역제안들을 거절했다. 지금은 위기일지도 모르지만,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고 긍정회로를 돌렸다.


18층 집에 들어서자 선선한 바람이 훅 불었다.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둘이 사는 깔끔한 중년 부부의 집이었다. “맞바람이 쳐서 시원해요. 우린 에어컨도 안 켜요.” 두 명만 살아서 방 3개 중 2개는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고, 창틀에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2주 정도 일찍 집을 빼야 했는데 날짜를 맞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을 보러 오면서 보관이사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집이 마음에 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널찍하고 깨끗한 집, 18층의 전망, 그리고 평수에 비해 낮은 전세금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계약하겠다고, 세 번째로 말하고, 드디어 가계약금을 보냈다.


높은 층이니 우리 딸이 좋아하겠다. 뭐, 결국 제일 좋은 집을 계약한 거니까 다행 아닌가. 대출은 문제없겠지?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남편이 불쑥 “언제쯤 대출 안 받나, 앞으로도 돈은 없겠지.” 자조한다. 나는 그 말이 “네가 일을 안 하니 이젠 앞으로 돈 모으긴 힘들겠다”로 들린다. 동네 쌀국숫집에서 소고기 쌀국수를 먹다가 투닥거리며 말다툼을 했다. 쌀국수값은 내가 냈다. 그래도 채용공고 사이트는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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