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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pr 22. 2022

좀머씨 이야기, 우리주변의 좀머씨.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몇 년 전 중고서점에서 샀던 1996년 초판 24쇄 '좀머 씨 이야기'를 읽었다. 고등학생 무렵일 때부터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내 관심사에 있었던 작가였지만, 어쩐지 쉽게 책에 손이 가지를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내 주변에서 책을 좀 읽는다는 친구들은 모두 쥐스킨트의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의 책을 결과적으로 한 편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왜인지 그의 책은 자꾸 다음에 읽어야지 하고 미루게 되었다.


좀머  이야기를 읽게   ' 자크 상빼' 삽화 때문이다. 한때 상빼의 책을 사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어느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몽땅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후로 어떤 것도 모으지 않는다. 그리고 한참  중고서점에 갔다가 상빼의 책을 다시   골라왔다. 그중에 상빼가 삽화를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이야기' 있었다.



사람들이 '좀머 씨'라고 부르던 한 사람


책을 읽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분량이 많지 않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에는 몇 가지 감정과 의문을 생각해보느라 시간을 보내야 한다.


제목 때문에 나는 좀머 씨가 주인공이거나, 주인공과 좀머 씨가 긴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서술은 '나'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그 시절 그의 마을에는 '사람들이 좀머 씨라고 부르던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좀머 씨는 거의 매일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좀머 씨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지팡이를 들고 배낭을 메고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닐 뿐이다.


이야기는 '나'의 좀머 씨 '목격담'이다. 하지만 우연한 혹은 우연치 않은 마주침 자체가 '나'와 '좀머 씨'의 교류였을지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나'의 유년시절의 중요한 장면마다 그가 걸어가고 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와의 약속이 깨지고 깊은 실망감에 빠진 주인공이 그녀가 노란 치마를 펄럭이며 사라진 언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좀머 씨가 걸어가고 있다. 무서운 풍켈 선생님에게 억울한 오해를 받고 호되게 혼이 난 날, 상처 받은 작고 어린 영혼이 나뭇가지 위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 발 밑에 좀머 씨가 걸어가고 있었다.



좀머 씨는 어디에나 있다.


우박과 비가 쏟아지던 궂은날 꿋꿋이 걸어가고 있는 그를 태워주려는 '나'의 가족들에게 좀머 씨는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고 소리친다. '나'는 조금 자란 후에 우연히 좀머 씨의 '중요한 순간'을 목격한다. 그때 '나'가 한 행동은 여전히 목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던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는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좀머 씨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들 말이다. 작가는 '좀머 아저씨는 가끔씩 사람들 눈에 띄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라고 썼다. 좀머 씨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그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에게 월세를 받으려고 비로소 그를 찾기 시작했지만 끝내 아무도 행방을 알지 못하는 채로 좀머 씨는 잊힌다.


무심하다는 것은 얼마나 '안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직후의 시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좀머 씨는 어쩌면 굳이 꺼내어 들추어보기 힘든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지도. 그는 그렇게 '살다가' 사라졌고 누구도 상처 받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좀머 씨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서성거렸다가, 또 말없이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좀머 씨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어쩌면 단 한 사람,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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