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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pr 21. 2022

잃어버린 지평선, 우리 안의 샹그리라.

잃어버린 지평선, 제임스 힐턴



유토피아의 발견


잃어버린 지평선이 발표된 1933년은 전 세계가 분열과, 착취와, 전쟁으로 고통을 앓고 있던 시기다. 그 시기를 살았던 많은 지성인들이 그런 사회를 탄식하고 비판했으나 '이성'과 '지성'의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는 점점 극한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지평선은 작가가 그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과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나는 작가의 관점에 상당 부분 공감하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샹그리라라는 이상 세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지평선은 소설이라는 장르로써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었고,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콘웨이'와 3명의 일행이 탄 비행기가 계획과 다른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서 의문의 사람들을 만나고 체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콘웨이와 일행들은 '장'이라는 인물을 따라 어디에도 알려진 적이 없는 한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은 바로 이상적인 사회 샹그리라다. 이들은 현대적이면서 동서양의 아름다운 요소를 모두 갖춘 라마교의 사원에서 기거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 사회를 이해한다.


콘웨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이어지는데, 불교와 도교 등에서 말하는 동양적인 가치관을 콘웨이와 장과의 대화, 그리고 200세가 넘는 승정과의 대화로 보여준다. 콘웨이는 샹그리라의 지도자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지목되지만 돌아가고 싶어 하는 멜린슨 대위와 마음이 끌리는 여인 로첸에 때문에 갈등한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콘웨이의 일행들 - 버나드, 브린클로 여사, 멜린슨 대위 - 이 어떻게 반응하고 또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비로운 샹그리라의 이상향적 가치관에 관심을 갖고 동화되어가는 콘웨이에 비해 이들은 샹그리라를 이루는 외적인 요소에 더 관심을 보인다.


거대한 금광의 존재는 샹그리라의 사람들이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정신적 수양과 자아실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데, 경제사범으로 쫓기는 신세인 버나드의 눈에는 그저 '이익이 될 무엇'으로 보일 뿐이다.


또한 샹그리라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자연과 종교에 순응하며 외부인들의 지배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브린클로 여사는 이들을 보면서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충만해진다. 그녀는 그들을 개종시킬 목적으로 티베트어를 배우며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콘웨이가 샹그리라의 정신세계에 이끌렸다면, 버나드나 브린클로 여사는 나름의 관점에서 그들의 유토피아를 발견한 셈이다.


반면, 멜린슨 대위는 끊임없이 샹그리라의 존재방식을 의심한다. 거대한 사기집단 혹은 위험한 일을 도모하고 있는 자들 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안전한' 본래 속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 샹그리라에 머무르며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로첸'과 사랑에 빠진다. '로첸'은 멜린슨을 도와 샹그리라를 빠져나가고자 한다. 나는 멜린슨 대위와 로첸을 보며 '모두에게 이상향'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상 세계 속 불편한 진실


그러나 나에게 '잃어버린 지평선'은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찜찜한 기분이 들게 하는 불편한 소설이었다. 그 이상향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 시대를 휩쓸고 모두를 고통에 빠뜨리게 한 식민주의적 행태가 고스란히 존재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우아하게.


샹그리라는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쯤에 있는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티베트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병풍처럼 풍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티베트의 라마교 사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샹그리라를 이루는 요소들은 유럽 중심 미학의 전형이다. 심지어 최고지도자는 외부에서 온 백인이다.


실제 식민주의가 자원과 인력을 유럽과 미국으로 착취해가고, 식민지에 그들의 세계를 건설했던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의도와 다른 비약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실제 동양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그 지역의 원래 주인인 티베트인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불편했다. 실제로 이 소설은 제국주의자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으로 쓰인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더러 받곤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이 든 것은, 과연 황금이 없으면 샹그리라는 샹그리라로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금광은 샹그리라가 물질적 부와 정신적 성숙의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나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상향 속에 그려진 서양문물의 유지를 위해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유토피아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백인들의 상상력으로는 완벽한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꼈던 불편함을 정리하면서 그렇다면 나의 샹그리라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 안의 샹그리라


소설 속 콘웨이와 승정의 대화에서 '파국적 전쟁'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샹그리라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작가는 당시 전쟁의 위기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다. 착취 위에 세워진 물질적 부, 한쪽으로 치우쳐진 채로 급변해가는 세상에 '중용'과 '조화로움', 그리고 '느긋함'이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던 것이다.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을 내면화한 상태에서 '잃어버린 지평선'을 읽으며 샹그리라에 동화되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본래 지닌 동양적 가치,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한 민중으로서의 의식이 살아있다면 도저히 즐겁게 읽히기만 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씁쓸한 것은 원래 우리의 문화와 정신적 토대를 이루고 있었던 '중용', '조화로움', '느긋함'의 가치들이 이미 상실된 시대에 그러한 가치를 찾는 운동들 또한 일정 부분 서구에 의지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 소설의 인기로 중국에서는 '중정'이라는 지역을 아예 '샹그리라'라는 이름으로 변경해버렸고, 샹그리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샹그리라는 없다. 각자가 그리는 샹그리라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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