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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ug 23. 2022

입을 크게 벌리고 ‘으와앙!!!’

세 살짜리 아이랑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점심을 먹은 후 설거지하고 남은 그릇과 음식들을 정리하는 동안 아이가 졸졸 따라다닌다.


“초콜릿 먹을 거야.”

“안돼. 아까도 먹었잖아.”

“으응~ 먹을래.”


나는 손을 멈추고 잠시 아이를 바라본다. 머릿속에는 식탁에 아이가 흘린 밥알들과 국물들을 닦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과 옷가지들을 주워서 세탁기에 넣고 나서 청소기로 대강 바닥청소를 한 후에 제발 편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꽉 차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아야 해. 내일 또 먹자.”

“싫어! 먹을거야!”

아이가 고집을 피운다. 그러곤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냉장고를 연다.


“안된다고!”


나는 참았던 짜증을 결국 터트리고 말았다. 거칠게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섰다.


“으와앙-!”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입을 있는 한 껏 커다랗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뱃심을 모아 한번 더 ‘으앙’하고 내지른다. 결국 나는 다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달래야 한다.


“으와앙”하는 울음소리는 아이의 무기이자 방패인 셈이다.


가끔은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오물조물 동그라니 자그맣던 입을 짝 벌려 순식간에 얼굴을 다 차지하고는 원망스럽고 또 간절한 눈물방울을 서슴없이 퐁퐁 솟아낸다. 그 얼굴이 못나면서도 참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는 내가 울 때마다 ‘바작주둥이’라며 놀리셨다고 한다. 어릴 땐 엄마가 그 얘기를 전해줄 때마다 뭐, 바지락 같다는 건가 하고 넘기곤 했는데, 최근에서야 ‘바작’의 정체를 알고 정말 ‘바작주둥이’가 되어 웃었더랬다.


‘바작’은 짐을 싣기 위해 지게에 올려놓는 소쿠리, 즉 발채의 사투리 말이었다. 조개 모양 같아 보이는 발채는 평소엔 얌전히 입을 납작하게 다물고 있다가 물건을 넣을 때 쫙 벌어지는 형태다. 그 정도 크기는 되어야 ‘으앙’하고 입을 벌리고 우는 아이에게 빗댈만하다. 바지락은 비할 데가 아니다.


참으로 예스러운 비유라 이해하기에도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입을 크게 와앙 벌리고 우는 아기의 얼굴을 보고 느꼈을 외할아버지의 마음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입을 벌린 크기만큼 속마음을 훤하게 내보이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만큼 ‘아이다운’ 모습이 또 있을까.


한때는 ‘바작주둥이’를 자랑하며 울었을 나지만, 마지막으로 그렇게 운 건 언제였을까?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면 나도 때론 입을 짝 벌리고 ‘으와앙’하고 울고 싶다. 그래도 마냥 사랑스럽게 바라봐 줄 나의 우주와 결국은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줄 손길이 그립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은 혼자서도 입을 꾹 다물고 눈에 고인 눈물을 애써 참아낸다. 초콜릿 하나를 먹지 못해 속상한 아이의 속마음처럼 어디에 내보일 수 없는 엉킨 마음들을 꾹꾹 눌러 삼킨다.


며칠 전, 아이가 등 뒤에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한참 동안 잠을 안 자고 토닥거려달라 노래를 불러달라 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열 두시가 다 되어가길래 빨리 자라며 화를 내고 돌아 누웠을 때였다.


훌쩍이는 울음은 더 이상 나의 울음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안다는 의미다. 미안했다. 나는 다시 돌아누워 아이를 안았다.


‘으와앙’하고 울 수 있을 때 마음껏 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아이가목젖까지 보이게 입을 벌리고 우는 까닭은 엄마가 아이의 속마음을 좀 더 잘 들여다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가야, 입을 크게 벌리고 으와앙하고 울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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