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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Oct 07. 2022

슬픈 노래는 부르지 말아요

창밖으로 노을이 진다. 오렌지색 햇살이 길게 드러누워 어둑어둑해지려는 집안의 빛을 겨우 붙들고 있다. 한낮의 일렁거림과는 다른 창밖의 어스름한 반짝임이 쌀쌀해진 공기에 더해 어쩐지 감상에 젖게 한다. 계절이 바뀌고, 또 한 해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아이가 장난감방에 앉아서 인형들을 가지고 소꿉놀이에 심취해있는 동안 나는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하며 어릴 적 좋아했던 동요 하나를 나지막이 불렀다. '노을'이라는 동요다. 아이는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잠자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더니 노래가 끝나자 말했다.


"이제 그만 불러. 슬퍼."


아이는 잔잔한 음악이나 노래를 들으면 금방 울상이 된다. 그날은 웬일로 노래 한곡이 끝날 때까지 참아줬지만 다음 곡은 단칼에 거절한다. 발랄한 장조의 음악이 아니면 아이에게는 모두 슬픈 노래다. 꽃밭에서, 클레멘타인, 섬집아기 같은 노래는 부르지 말라고 한다. 이루마의 피아노곡 같은 음악도 안된다.


지금처럼 감정을 표현하기 훨씬 전, 100일을 조금 넘겼을 무렵에는 아이를 안고 재우면서 이런저런 노래를 많이 불러줬다. 몇십 년간 부르지 않던 동요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면서 '내가 아직도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니!' 싶기도 했고, '가사가 뭐였지?'하고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가면서 불러줬다. 그런데 4개월 무렵 '오빠 생각'을 부르기만 하면 울음을 터트렸다. 평소 무언가 불편해서 울 때와는 다르게, 입을 삐죽삐죽하다가 '뿌에엥~'하고 울었다.


지금도 아이는 '뜸북뜸북~ 뜸북새~'하고 노래를 시작하면 내 품에 고개를 파묻고 '슬퍼'하고 말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슬픈 노래들은 금지령이 내려졌는데 '오빠 생각'만큼은 가끔 불러달라고 한다. 전생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아이는 확실히 나와는 기질이 많이 다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봐도 조금 센티한 구석이 있었다. '우울'이라는 단어를 알기 전에도 나는 '우울'했다. 환경과 무관하게 그런 그냥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나는 진심으로 '즐겁다'거나 '행복하다'라는 기분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무덤덤하거나 혹 좋더라도 무덤덤하려고 애썼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냥 그랬다.


엄마의 기억 속에 어린 나는 '아무 말도 안 하는 아이'였다.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늘 입을 다물고 뚱하게 있었던 아이. 또래 친구들이 우르르 뛰어다니며 깔깔댈 때 나는 무엇에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어떤 것이 재미있는 걸까? 왜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 기분은 늘 울적했다.


그런 기질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조금 쓸쓸하고 구슬픈 느낌의 동요를 좋아했다. 섬집아기, 오빠 생각, 노을, 꽃밭에서, 바위섬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조금 울적한 감정에 빠져있을 때가 가장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였다. 말하자면 나는 좀 청승맞았다. 엄마 아빠가 불러주던 옛 동요들은 그러고 보면 처량한 멜로디가 많다.


아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좋아하는 노래는 '바나나 차차'나 '티키타카'같은 뽀로로 동요다. 최근에는 '작은 별', '개미 심부름', '곰 세 마리'같은 노래들을 부를 줄 알게 되었다. 가사가 단순하고 즐겁다. 나도 같이 부르면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 아이는 기분이 좋으면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달려와 안기기도 하며 '너무 좋아! 즐거워!'같은 말도 자주 한다. 나도 아이랑 같이 폴짝폴짝 뛰며 팔도 흔들고 엉덩이도 흔든다.


나는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엄마는 비록 가끔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쾌활한 사람이었고, 아빠는 온화하고 친절해서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좋아했다. 자라면서 주변 어른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었고, 많은 친구를 사귀지는 않아도 나를 챙겨주는 친구들이 항상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함'은 내 '디폴트' 상태였고 내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삼십 대를 햇살이 눈부시게 쨍쨍한 나라에서 보내고 와서인지, 마음 챙김에 관심을 갖고 노력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에 비하면 지금 굉장히 긍정적인 기분으로 살고 있다. 가끔 찾아오는 '우울'도 그저 받아들인다. 우울한 감정을 부정하려고 한 적도 있지만 내가 가진 많은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햇살이 가라앉는 저녁에 잠시 청승을 떠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아이가 나보다 훨씬 밝은 표정을 짓고, 즐겁고 행복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만약 훗날에 슬프고 우울한 날이 찾아온다면 그것도 '괜찮은 감정'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지금은 슬픈 노래는 부르지 말라고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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