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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Feb 21. 2020

어른이 주는 거니까 무조건 무조건이야?!

아는 것이 힘인데 아는 만큼 머리 아퍼


우쥬 라익 썸씽 투 드링크? 

커피를 좋아한다. 어쩌면 커피 자체라기보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과 음료를 만들어내는 과정, 그라인더에서 막 갈아져 나온 갈색 원두가루의 촉촉하고 고소한 향기를 더 좋아하는 것도 같다. 나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개인 카페에서 두루 일해 봤다. 와인 소믈리에처럼 커피에 정통한 지식은 깊지 않더라도 카페에서 일하며 나름의 자부심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위생이었다. 특히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위생에 대해서 더욱 까다로웠다. 나 하나의 잘못으로 전 지점과 기업까지 타격이 갈 수 있기에 위생관리는 평소에도 철저히 하고, 예고 없이 슈퍼바이저가 들이닥쳐 관리감독을 했다. 덕분에 지금도 그런 카페를 가면 안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느 음식처럼 커피도 주요 재료인 원두, 만드는 바리스타의 능력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똑같은 원두와 머신을 썼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의 나는 커피와 전혀 무관한 일을 하고 있지만 커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BGM 같은 존재.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있으면 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 그동안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나라 커피 시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회사 주변에만 해도 크고 작은 카페가 셀 수 없다. 투썸, 이디야, 개인 카페만 해도 옆집 건너 옆집, 윗동네, 아랫동네.... 열거해서 무엇하리! 

오늘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점심 회식을 했다. 코로나19로 마치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공기마저 휑휑한데 앉아서 고기를 굽고, 후식으로 누룽지탕을 먹었다. 건강히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 일 없는 일상이다. 밥을 먹고 나니 대표님이 커피를 쏘신다. 센스 있는 분. 회사에서 제일 어린 친구가 먼저 카페에 가서 주문서를 건넨다. 회사 근처에 단골처럼 드나드는 카페도 있고, 손님이 오면 가게 되는 대형 프랜차이즈 사이에서 처음 가보는 작고, 허름한 카페다. 능숙한 솜씨로 주문을 받고 암산으로 계산을 하는 사장님은 여자 어르신이었다. 어린 시절 화장하는 엄마를 보는 게 재미있었는데, 카페에서 음료를 만드는 과정은 그것처럼 흥미롭고 좋다. 어제까지 급한 업무들을 끝내 논 뒤라 느긋한 마음으로 음료 만드는 걸 구경했다.-더군다나 상사들도 함께 밖에 나와 있으니 이 시간 눈치 볼 일도 없다- 연세가 있으신 사장님은 어디서 커피 만드는 걸 배우셨을까? 아주 오랜 시간 카페를 해오신 것처럼 동선이 딱딱 맞고, 10잔이 넘는 음료도 당황하지 않고 뚝딱 만들어낸다. 아아, 뜨아, 라테, 아이스바닐라라테, 밀크티까지! 요새는 전자저울을 이용해 커피를 만드는 카페들이 흔하다. (라테도 안 그랬는데!) 카페가 흔해진 만큼 커피의 퀄리티에 대한 대중의 요구도 높아진 탓이리라. 직업에 대하 자부심을 갖고 바리스타들은 정확한 원두 그람을 맞추고, 날씨에 따라 무게, 추출속도 등을 결정하기도 한다. 위생이야 기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당연히 갖춰야 할 예의다. 


아이돈노

작고 허름한 카페는 음료 값이 저렴했다. 사실 경쟁업체인 단골 카페와 큰 차이는 없다. 사장님이 만든 커피 음료에는 제각각의 에스프레소가 추출되어 담겼다. 그라인더에서 눈대중으로 원두를 뽑아내니 그럴 만도 한데 분쇄된 원두의 양이 적은 편이다. 말씀은 투 샷이라고 했지만, 한눈에 봐도 원 샷을 나눠 담는 농도로 묽다. 그런 거야 크게 상관없다. 바리스타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지고, 상황에 따라 비싼 돈을 주고도 맛없는 커피를 먹을 때가 있으니! 아, 그런데 자꾸만 눈에 걸리는 위생.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에 남들 눈에 안 보이는 게 참 잘 보인다. 

사장님은 일회용 컵을 꺼낼 때 음료가 담길 컵의 안쪽까지 손을 넣었다. 굳이 저렇게 꺼내지 않아도 될 텐데 손은 항상 세균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다. 얼음을 꺼낸 주걱은 다시 제빙기로 들어갔다. 컵에 얼음을 담을 때도 당연히 얼음에 손이 닿았다. 얼음이 컵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손을 대고 계셨기에, 손닿은 얼음이 모두의 음료에 담겼다. (다행히 사장님은 천주교신 것 같다!) 인심만큼은 백점이다. 열 잔을 넘게 주문해서 기분이 좋으셨던 건지, 아님 원래 그런 분이신지(후자인 것 같지만) 라테에 우유를 아끼지도 않았고, 진하게 먹으면 샷을 더 내려주신다고 했다. 바닐라 시럽 같은 건 공짜. 달게 먹고 싶은 만큼 넣으라고 하셨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푸짐하게 담긴 커피의 무게를 느꼈다. 나는 이 카페를 또 이용하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들 왜 그러냐고 하길래 내가 본 위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선배는 그래도 나이든 어르신이 해주신 건데 그냥 먹지. 뭘 그러냐고 했지만…. 아는 게 문제다. 그러면 안 된다고 배운 게 문제다. 기침도 눈치 보며 하는 때인지라 너무 눈에 띄어버렸다. 그럼 세상이 다시 건강해지면, 어른이 해준 거니까 당연히 받고 기분 좋게 마셔야 하는 건가. 물론 내가 늘 가던 카페를 이용하고, 오늘 처음 간 이 카페를 다시 안 간다고 해서 사장님이 이상한 낌새를 챌 일도 없겠지만. 내가 본 인상적인(?) 부분을 굳이 동료들에게 꺼낼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만 모른 척하면 되는 건데. 어쩌면 그게 예의일 수 있는데. 

나는 신경 쓰였지만 수많은 카페들 사이에서 여전히 저 카페가 건재한 이유가 있겠지. 내가 눈에 띈 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관심이 안 가는 부분일 수도 있고. 안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나는 나의 삶을 살아내리. 그것도 열심히! 어르신이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고 계신 것처럼! (아, 근데 아직도 모르겠네. 찾아가서 위생에 대한 조언을 드리는 게 옳지 않을까? 응. 그건 오지랖인 것 같아. 암튼 굳이 내가 신경쓴 것을 회사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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