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우리 모두 떠나가니까

그때 참 좋은 꿈을 꾸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by 나비


DraWing mY dAy

과거와 미래에 삶의 점을 찍고 헤매는 대신 되고 싶은 나를 그리며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살찐 고양이처럼 “우리는 게을러!” 자주 외치는 Nabi가 쓰고 Jin이 그립니다.


: : 날씨, 음악, 그날 만난 사람에 따라 의도했던 이야기는 동선을 벗어나기 일쑤. 그래서 삶이 통통통.




우리는 젊음을 거치고, 사랑을 하고 그리고...

그날 나는 서울 종로에 한옥 관련한 취재가 있었어.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왔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비는 썩 유쾌한 손님은 아니잖아. 네모난 마당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고 대청마루에 앉아 비가 쏟아지는 걸 바라봤어. 흙과 나무로 지어진 한옥에 후두-둑 쏟아지는 비와 비에 젖은 집의 내음은. 그래, 이 집을 산다면 빼놓을 수 없는 옵션인 것처럼 근사했어. 정작 그곳에서 어떤 취재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택시 안에 이상은의 노래가 흘렀다는 건 알아.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이 노래는 1993년, 이상은의 5집 앨범 타이틀곡이라고 하는데 그 시절 내가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던가. ‘그렇게 이제 뒤돌아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시를 읽듯 나지막이 노랫말을 읊조리며 비에 젖은 종로 거리를 지났어.


어린 시절 나는 한 번도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어른이 된다는 건 왠지 우울했거든. 내가 되고 싶든, 말든 어른은 되는 거니까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되고 보니 나는 어른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이 되기 싫었음을 깨달았어.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가까운 가족부터 친구, 오늘도 나와 함께 버스와 전철에 놓였던 수많은 타자를 생각하는 시간은 단순히 나이가 든 탓은 아닐 거야.


나는 경계해야 해. 모든 가능성을 ‘나이 들었다’고 닫아두는 문을. 어차피 우리는 젊음을 거치고, 사랑을 하고, 모두 떠나가니까.


202007_srt_main_print.jpg 책 읽는 나비 / 그림 @lazy_ipad


배워야 해 그 모든 것에서

이날 나는 경계의 문을 열고 싶었나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만든 그들만의 세상을 구경했어. 그들은 젊어서도 아니고, 부자라서도 아니고 다만 씩씩하고 용감해서 자신만의 세상을 일구고 있었어. 나보다 참 어른스럽지. 지난 템플스테이 취재를 통해(내 일은 참 고마운 것이야) 만나게 된 슬기에게 핸드드립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어.


포항 보경사의 주지 스님께서 직접 만든 커피 드리퍼를 선물로 주셨는데 그날 바로 원두며 종이필터며, 그라인더를 설레며 주문했어. 집 안에 은은히 퍼지는 커피 향기. 이래서 사람들이 핸드 드립을 하는구나 싶었어. 그런데 가장 중요한 기술자(나)가 영 시원찮잖아. 아까운 다기를 잘 쓰는 방법은 제대로 배우는 수밖에!



맑디맑은 하늘에 흰 구름은 동동. 여름을 맞이한 불광천에 초록 생명들은 진하고, 슬기의 카페 다르크는 지도 앱을 보지 않더라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지척이라 여유로운 마음으로 징검다리를 건넜어. 이럴 때는 내가 세상 최고의 부자 같아. 핸드 드립 강의를 해줄 슬기는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또 아니었어.


그저 아는 동생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된 슬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수업 준비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는 수업에 열중하는 제자. 진지한 자세로 하나라도 놓칠 새라 귀를 기울였어. 오랜만에 펜을 들고 필기를 하자니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더라.


역시 배움은 좋은 거야. 알아가는 건 꼭 필요한 것이고!

sub_01_print.jpg 커피를 알아가요 / 그림 @lazy_ipad


슬기 선생님이 내려준 커피와 내가 내린 커피를 맛보며 다시금 핸드드립의 중요성을 깨달았어. 똑같은 원두와 물을 썼더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니 커피는 참 탐구 대상, 매력적이야. 슬기는 카페와 함께 또 다른 미래를 위해 길을 내는 중이야. 덕분에 아주 바빠서 이날 한 시간밖에 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또 기회가 있겠지?


두 번째로 들른 카페는 다르크와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otr(off the record)’이야. 요새 많이들 쓰는 ‘힙하다’(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개성이 강한 것을 의미)에 딱 들어맞는 곳. 강현우, 부성제 사장은 서른을 훌쩍 넘긴 동갑내기로 친구이자 otr의 동업자야. 처음에는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들을 20대로만 봤는데 나는 아직 멀었어. 부성제 사장은 아이 아빠인데다가 강현우 사장은 30년 이상을 수학밖에 모르던 수학 전공자였대.


“4~5년 전 우연히 여행에 취미를 붙였고 색연필로 우연히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이곳은 실험실 같은 공간이에요. 작품 활동도 하고 커피도 판매하고 작가들 작품 전시고 하고요.”


otr은 작은 카페야. 테이블도 몇 개 되지 않고 큰 냉장고도 놓을 수 없을 만큼 아담하다고. 나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개인적 호기심으로 궁금한 질문을 했어. 그 나이 대에서는 ‘친구가 아파트 분양을 받아서 얼마 이익을 냈다더라’, ‘너도 주식을 해.’ 뭐 이런 대화가 일상적이니까.


그래. 쉽게 말해 이 선택에 대해 불안하진 않느냐는 질문을 했어. 아주 심플한 대답이 돌아오더라고.


“불안하지 않았다.”


머니가 목적이었다면 대답은 달라졌겠지만 두 친구는 연구자의 자세로 이곳에서 실험 중이거든. 커피 실험, 그림 실험, 돈 실험, 관계 실험 등등. 암튼 신나고 진지한 실험을 위해 1년 간 커피를 배웠고, 연남동이며 망원동, 이태원을 다니며 실험실을 물색하러 다녔어. 수도 시설도 없는 오래된 옷가게였던 이곳을 우연히 만나 두 사람의 손 안 거친 데 없는 ‘힙한 오티알’이 탄생됐지.


직장을 다니면서 ‘나이스’한 창작물을 만들어낸 김다정(다쟈이너) 작가와 그의 작품도 봤어. 퇴근 후, 주말마다 그 모든 게으름을 떨쳐내고 전시를 할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니 나이고 뭐고 존경 받아 마땅해. 이럴 때는 자괴감과 자극이 동시에 온다.



어차피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면 최대한 마음 가는 대로 살아봐야겠어. 우리는 세상에 나와 하나의 마침표를 찍고 사라지는 존재. 언젠가 한바탕 꿈 꾼 듯 사라질 때 참 좋은 꿈을 꾸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다시 그 꿈을 꾸어도 좋을 만큼 충만한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