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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an 29. 2021

여행하는 일

참 보기 좋지유. 다들 할 말은 있어



밤사이 내린 눈이 발등을 덮고, 종아리까지 찼던 아침나절
포토그래퍼 실장님과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완주의 공기마을 편백나무숲
마을 입구까지 차로 가다가 눈이 너무 많이 쌓여
후진을 하는데, 차가 미끄러지며 바퀴가 눈속에 콕 박히고 말았다.  

나는 실장님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데 워낙 성정이 조용하시고 너그러우신 분이 울그락불그락하였고 핫하디핫한 젊은 시절 겪었던 일을 이 나이에 또 겪어야 함에 절망하는 눈빛도 있었다.


혹시나 내 몸무게가 눈길에 차가 빠지는 데 영향을 미치기라도 한 듯 속으로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실장님, 제가 너무 괴롭히고 다니죠. 엉엉.


"삽이 있어야 하는데... 큰일이네."

왼쪽 바퀴가 푸욱 빠지고 말았다

마을엔 사람은 커녕 개 한 마리 키우지 않는 듯 조용했다. 이른 아침이기도 했고 너무 추웠던 때였다. 그러다 어느 건물 앞에 마치 우리를 기다린 것처럼 놓여 있는 삽과 빗자루를 발견했다. CCTV에 대고 잘 쓰고 금방 갖다 놓겠다며 허락을 구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실장님은 이게 실패하면 우리의 오늘 하루는 끝장이라는 일념으로 바퀴의 눈을 쉼없이 퍼 날랐다. 몇 달전에 뻘밭에 차가 빠진 전력이 있었는데 그땐 렉카라도 불렀지 이런 날씨, 이런 눈밭에서는 렉카도 꼼짝마.


장갑 낀 손까지 동원해 눈을 퍼 나르고 비질을 하고 실장님처럼 바퀴 아래 낙엽도 깔았다. 원고 쓸 때보다 더 열망에 찬 몸짓. 차에 탄 실장님이 엔진을 켤 때마다 제발제발 하였다. 한 30분 씨름하고 3번의 시도 끝에 다행히 차를 구출했다. (내려오는 길에 실장님은 마치 훈장처럼 타이어가 용쓴 흔적을 가리켰다. 3번 만에 성공했네요. 휘유.)


우리는 차를 안전한 곳에 세워두고 후진했던 숲 입구까지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이 고생을 하고 숲을 안 보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윽고 숲 안쪽 다다르자 눈이 더 깊다. 따듯한 집과 이불 생각이 간절한데 실장님은 자꾸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아, 너무 춥다. 눈이 온다고 하였으나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신발 안으로 차가운 눈이 들어온다. "실장님, 이제 더 깊이 들어가진 마세요-요-요." 멀리서 실장님이 날 쳐다본다. 손끝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크게 엑스를 그렸다. 더 깊이 노. 그러나저러나 눈꽃이 맺힌 편백나무는 참 어여뻤다. 실장님은 실장님대로 나는 나대로 카메라에, 눈에 이 풍경을 담았다. 여행하는 일이 내 일이 될 줄이야. 가끔씩 아니, 자주 나는 이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참 신기하다. 알고보면 난 집순이계의 이단아였던가?!

1월이지만 크리스마스 같았던

오들오들 떨며 숲을 돌아나오는 길, 실장님이 다시 멈춰선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목화솜 같은 눈 위에 앉은 참새들을 담는다. 나는 바지라도 입고, 운동화라도 신었것만 참새는 저 차가운 눈밭을 마치 둥지처럼 당연히 여기는 것 같다. 눈으로 직접 본 것보다 실장님이 담은 찰라의 순간이 더욱 애틋하고 근사하여 이 날의 일들을 떠올려보게 됐다.



전국적으로 내린 이 날의 폭설로 고생한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어제 눈 소식에는 일찌감치 제설작업이 진행되었고 출근길에는 벌써 눈이 녹아 응달진 곳에만 드문드문 눈이 쌓였다. 갈증이 잔뜩 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들고 회사로 향하는데 비둘기들도 목이 마른지 조금 남은 눈을 쪼아 먹고 있다. 저 발바닥은 얼마나 시릴까. 눈을 먹는다고 배가 부르진 않을텐데 살아 있는 생명들의 행위가 쓸쓸하고 위대하다. 


걷다가 문득문득, 오들오들 떨다 문득문득 불평보다 만족을, 만족보다 기쁨을, 기쁨보다 감사함을 오롯이 느끼는 사람이 되자. 나보다 한참 작은 새들도 저럴진데.

참새야, 참새야. 작다고 생명이 작을까. 널 보며 오늘 하루도 으쌰  ⓒ효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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