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서 식당을 예약한 적이 있거나, 줄 서야 들어갈 수 있는 식당에서 기다림을 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울증이 아니에요. 그냥 그 순간 빡친 걸 수도 있습니다.”
독립한 지 1년하고 3개월이 흐르고 있다. 내가 사는 집은 낡고 오래된 아파트고 세대수가 적어 아파트 자체에 커뮤니티 시설은 1도 없다. 오히려 아주머니들의 간섭과 관심이 지나친 정도? (내가 내다 놓은 재활용쓰레기가 내 것인지도 알다니!)
이 오래된 단지 옆으로 세대수가 제법 되는 새로운 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했다. 새 아파트 덕을 보는 게 이런 거구나. 오랜 기간 공사를 해서 우리 아파트도 힘들었으니 이런저런 보상을 해줘가 실시됐다. 울퉁불퉁했던 주차장 바닥은 아스팔트가 깔리고 흰색 실선도 새로 칠했다. 아파트 출입구에 들어서면 반들반들 새카만 바닥에 얼굴까지 환해지는 것 같다. 페인트가 벗겨진 외벽도 깔끔하게 색칠해줬는데, 사람으로 치면 회춘한 것과 진배없다. 내가 제일 반가운 건 새 아파트의 1층 상가들이다. 몇 개월간 빈 자리였는데 봄이 오고, 여름이 찾아오며 편의점, 술집 원, 투. 채소과일가게, 식료품점, 빵집까지 속속 보금자리를 틀었다.
언제나 온라인 몰에서 장을 보면 엘리베이터 없는 탑 층이라 물건 주문을 맘 편히 못했다. 사고 싶은 게 있어도 혹시나 들고 올라오는데 무거울까봐 우유 2개 살 거 하나사고, 과일 두 종류 살 거 하나 사고 그리했다. 그런데 코 닿을 데 과일 가게가 생긴 것이 삶의 질을 올려줄 줄이야.
애호박 천원, 시금치도 한 단에 천 원, 비쌀 땐 2000원, 오이도, 양파도 대개 가격이 그러하다. 독립하고 오프라인으로 오이와 양파를 사보긴 처음이다. 내가 원하는 때, 적당한 양의 채소를 살 수 있으니 음식이라고 할만한 것도 그때그때하고, 버리는 채소도 줄었다. 무려 제철 과일도 사먹는다. 여름엔 수박, 요새는 복숭아가 제철인데 물복, 딱복 다주세요. 한 번도 과일값을 깎으려고 한 적도, 깎을 생각도 한 적 없는데 푸짐히 샀나 싶을 때는 500원, 천 원 빼주기도 하신다. 양 손 바리바리 채소들을 사들고 집에 올라가는 발걸음은 참 가볍다.
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산 건 맥주! 어렸을 때부터 집 가까이 편의점 있는 게 하나의 바람이었는데 이 또한 생활의 기쁨이 된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혼술족이 늘었다는데 이래저래 겸사겸사 나도 혼술족 일원이 되었다. 새로운 맥주와 내가 못 먹어본 맥주들은 지구상에 왜케 많은 거야. 편의점 쇼케이스를 바라보는 내 눈은 하트가 뿅뿅. 다양하게 맥주를 섭렵해가는 나를 사장 아저씨도 칭찬해줬다. (본인은 좋아하는 맥주 하나만 죽어라 마셨는데 아가씨처럼 다양하게 맛보고 내 맛을 알아가는 것도 좋다며)
또 하나 내 삶의 즐거움이 된 건 빈티지 옷 가게. 처음에는 빈티지 숍인지 몰랐는데 옷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물어보니 구제 옷이라고. 언젠가 부산 깡통시장에서 처음 만난 빈티지숍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디자인, 흔치 않은 컬러, 질 좋은 원단, 저렴한 가격의 스커트가 가득했더랬다. 내 몸에 맞는 옷만 고르면 돈 쓰고 돈 버는 셈이랄까? 그 가격에 그런 옷은 또 만나기 어려우니. 아니, 그런데 이런 숍이 우리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것 아닌가.
독립하고 한 일 년은 옷가게네. 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최근 2~3개월 사이에 몇 번은 들락날락 거렸다. 옷 한 벌에 3000원 짜리도 있고요. 이건 꼭 사야해!하는 그런 옷도 채 2만 원을 넘지 않는다. 남이 입던 옷이라고 찝찝할 수도 있지만, 내 기준에서는 옷에 보풀 하나 없는 데다 디자인이 흔치 않고 세련됐다. 모든 옷이 다 괜찮은 건 아니고 빈티지 어느 매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취향, 사이즈에 들어맞는 한 두 벌만 있어도 베스트인 것이다. 이 옷 가게를 만난 후 온라인 쇼핑을 거의 끊었다. 그냥 눈요기만 하고 들어갔다가 장바구니 가득 채워 쇼핑할 때가 왕왕 있었는데 이제는 직접 입어보고 실속 있게 구매할 수 있게 됐으니 온라인에서 시간을 쏟을(가끔 버리는) 필요가 적어진 것이다. 빈티지 옷을 구매할 때마다 기존에 안 입는 옷들도 하나씩 정리하고, 새 옷이지만 영 손이 안가는, 남이 더 잘 입을 것 같은 옷들은 지인에게 나눔도 했다.
김창옥 강사의 최근 영상에 우울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선생님, 저 우울증인 것 같아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최근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서 식당을 예약한 적이 있거나, 줄 서야 들어갈 수 있는 식당에서 기다림을 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울증이 아니에요. 그냥 그 순간 빡친 걸 수도 있습니다.”라는 명쾌한 답을 내려준다. 음, 지난 한 계절. 나도 빡쳐 있었던 걸까? 무엇에? 김창옥 샘은 식당에 비유했지만, 내게 식당을 대체하는 건 과일가게와 빈티지 숍이다. 집 근처 과일가게에서 제철과일을 보고도 맛있겠단 생각이 들지 않는 것. 맵시나는 옷을 봐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우울증일 것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런 것들에 마음이 설렌다. 소소하지만 멋이 나는 소비가 생활의 기쁨이 되고, 인생에 활력을 주고 있다.
역으로 혹시 그런 의문을 가진 채 아직 답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나 우울증인가? 우울한가? 우울해.’ 그런 상태라면, 두 손 놓고 있지 말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길 바란다. 맛있는 음식을 일부러 찾아 먹길 바란다. 줄까지 설 필요 무에 있나. 입꼬리 슬며시 올라가는 그런 맛이라면 족하다. 집 문을 열고 몇 걸음 걸어 나가 시원한 맥주를 사고, 한 계절 맵시를 뽐내줄 손때 묻은 옷을 사도 좋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