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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창숙 Nov 17. 2021

전입신고와 인감도장

살아온 날의 단상

  36년 전 일이다. 올해가 2021년이니까.


 추운 겨울 2월이었다.

이사를 하고 '전입신고'를 끝내 할 날을 며칠 앞두고 아들을 등에 업고 담요  장을 덮어쓰고 한 정거장을 걸어 동사무소를 갔다. 지금으로서는 주민센터이다.


 그때만 해도 포장이사라는 것이 없을 때였으니, 이사 가기 한 달 전부터 박스를 얻어다 일일이 이삿짐을 싸야 했고, 이사 가서는 입주 청소가 없었으니 청소부터하고 박스를 하나씩 풀어 정리하는 일이 한 달 이상씩 걸렸다.


  남편은 회사를 가야 했고 지금처럼 5일 근무가 아니니 일요일에만 이삿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주중에는  아이를 등교시키고 돌 전인 막내하고 정리하느라  전입신고를 해야 할 날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깜박하면 전입신고하는 걸 놓칠까 생각난 김에 서둘러 막내를 들쳐업고 동사무소로 향했던 것이다.


 그날따라 바람도 세차게  불었고 아이를 등에 업고 온 것이  힘들었다기보다 덜 추운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동사무소에 들어가 푹 덮어썼던 담요를 벗기니 그제야 아이는 기지개를 켰다. 나는 이사를 가서 처음 방문한 낯선 동사무소에서 '전입신고'라고 쓰인 곳으로 갔다


  동사무소에는 날이 추워서인지, 일찍 와서인지 직원들 외에 용무를 보러 온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나  담당자는 인사를 한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일하느라 못 들었을까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저... 전입신고하러 왔는데요." 나는 아주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그 담당자는 그때까지도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담당자는 무언가 책상에서 끄적거리고 있어서 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내 말을 듣긴 했는지 한참 후에야 쳐다보지도 않고 "인감도장 갖고 왔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나는  인감도장을 안 갖고 왔던 것이다. "안 갖고 왔는데요." 했더니 "가서 인감도장 갖고 오세요."라고 또 쳐다보지도 않고 담당자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난감했다. 아이를 업고 집에까지 갔다 와야 하는 상황에 다시 오는 게 힘에 겨웠다.


  "내일 다시 와야겠네." 하고 생각하고는 담요를 아이에게 덮어 씌우며  동사무소를 나오려는 순간 "전입신고에 인감도장이 필요하다고? 전입신고에 왜? 인감도장이 필요하지? 법이 바뀌었나?" 나는 그 담당자에게 다시 가서 물었다.

"전입신고에 인감도장이 필요하나요?"  했더니, 그때서야 나를 쳐다보았다.

"아, 그냥 해드릴게요."라고 아주 귀찮은데 선심을 쓰듯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 그냥 해주겠다니요? 제 말은 전입신고할 때 인감도장이 필요하냐고 물었어요."

"그냥 해주겠다니까요?" 담당자는 해주겠다는데 웬 말이 많으냐는 투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니요. 그 말씀만 해주세요. 전입신고할 때 인감도장이 필요한지요."  담당자는 나를 보며 아주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등에 하나 들쳐 업고 담요를 덮고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은 내 모습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존재로 여긴 듯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그 담당자를 툭 치며 "얼른 해 드려."라고 얘기했고, 그 담당자는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거들먹거렸다.


  "그 말씀만 해주세요. 전입신고 때 인감도장이 필요한지요."  담당자는 나를 아랫사람 보듯이 보고 있었고, 옆에 있던 직원은 나한테 빨리 볼일 보고 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나는 덮어 씌운 담요도 벗기고 다시 물었다.


"전입신고할 때 인감을 가져와야 한다면 다시 집에 갔다 오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건 인감도장이 전입신고할 때 필요한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나는 그 담당자를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그 담당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동장실에서 동장님인 듯한  연세 지긋한 분이 "무슨 일인가?" 하시며 나오셨다. 밖에서 큰소리가 나는 걸 들으셨나 보다. 그곳에 있던 직원들은 그분이 나오시니 모두 일어나 나를 보고 담당자를 보며 난감해했다. 나는 그분이 동장님임을 알았다. 그러자 동장님은 나를 보더니 "이리로 들어오셔서 말씀하시지요." 하며 나이 어린 내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셨다. 그리고는 따뜻한 차 한잔까지 주문하며 나를 보고 차 한 잔 마시며 편하게 천천히 말씀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동장님께 물었다. "전입신고를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인감도장을 안 가져왔다고 가져오라고 하네요. 전입신고할 때 인감도장이 필요한가요? 제가 재차 물으니 인감도장을 안 갖고 왔는데도 해주겠다는데, 이건 불법인 거지요. 법적으로 인감도장 필요하다면 갖고 와야 전입신고를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근데  전입신고할 때 언제부터 인감도장이 필요했죠?" 내 말에 동장님은 어쩔 줄을 몰라하셨다.


 그리고는 "아마 담당자가 무슨 착오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군요." 하시더니 문밖을 향해 "ㅇㅇㅇ들어오라고 해" 하는 것이었다. 잠시 담당자는 들어왔고 동장님과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자네 무슨 착오가 있었나 본데 애기 엄마에게 사과드려. 이 추운 날 이게 무슨 일인가? 더군다나 아이까지 업고 온 사람에게." 하며 호통을 치셨다.


  그 담당자는 조금 전의 모습은 어디 가고 비굴한 모습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동장님께선 담당자에게 어서 전입신고를 해드리라고 하면서 내겐 연신 죄송하다고 하셨다. 나는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모든 용무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어처구니도 없으면서 과연 그 담당자는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아이를 업고 있는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에게 추운 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행한 것에 화가 났다.


과연 그 담당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약자에게라도 화풀이를 해서 풀어야 할 일이 있었던 걸까?


동사무소 직원이면 주민들을 위한 민원을 해결해  주는 책임을 맡고 있는 공적인 사람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불쾌하거나 힘든 일이 있더라도 정의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아야 하는 본분이 있지 않나?


  이 일이 며칠을 두고 마음이 걸렸다. 그 담당자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들일 것이다. 아마도 한 순간 잘못한 일로 동장님께나 동료들에게 핀잔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날이 좀 풀린 날 요구르트와  귤을 사 가지고 동사무소로 갔다. 동사무소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그 담당자가 나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 담당자는 놀라는 눈빛이었고 말투는 상냥하지는 않았으나 죄송스러운 말투였다. "며칠 동안 힘드셨지요? 직원분들과 나눠 드세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갖고 간 요구르트와 귤을 내밀었다. 그 담당자는 나를 한참 쳐다보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라고 정중히 말하며 정말 딴사람이 된 듯 인사를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가벼워서인지 날씨가 춥지 않아서인지 발걸음 또한 가벼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람은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의적인 잘못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회적인 약자인 아이들, 여성들, 노약자들에게 행해지는 많은 잘못들을 보며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때 '양심'이라는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준이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일은 살아오며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일이었다.


                '홍천의 늦가을에' 사진:빈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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