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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Nov 01. 2023

11월, 첫날

감기조심하세요

아마 지난 토요일 일정이 나에게는 힘들었었나 보다. 


뮤지컬 <레베카>를 보러 고등학교 동창 여덟 명이서 서울에 갔다. KTX를 타고 갔는데 그것만으로도 친구들은 몹시 들떴다. 나는 매주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다니고 있어서 감흥이라고는 없는데, 들뜬 친구들은 나만 믿는다며 자신들의 수다에 빠져들었다. 기차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다니는 서울이라는 곳은 나에게 낯선 곳이 수밖에 없다. 그냥 갈 곳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곳이기에 다른 곳을 자세히 쳐다본 적도 없다. 나는 시간을 타이트하게 짜서 다니는 편이어서 빠르게 걸으며 내 갈길만 간다. 사내강사 시절에 부산에 강의를 다닌 적이 있는데 기차 타고 지하철 타고 강의장에 갔다. 그게 다다. 바다 끄트머리도 보지 못했다. 사실 목적한 것 이외에 관심이 별로 없는 성격 탓이기도 하다.


친구들은 내 뒤를 따라 화장실에 가고, 커피솦에 가고, 지하철을 타고 길을 걸었다. 버스를 타고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녹초였다. 뭐 한 것도 없다. 그러나 혼자 걸어 다니다가 친구 일곱과 함께 다니는 것이 쉬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나까지 여덟을 세고 또 세고, 지하철과 버스에서 돌아다니며 '다음역이야, 다음역에서 내려.' 하고 혹시라도 누구 하나 놓칠세라 눈동자가 바빴다. 친구들은 모를 거다. 그냥 나 혼자 바빴다. 하하


옥주현과 테이가 나오는 뮤지컬 <레베카>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가독성이 몹시 떨어지는 책을 읽은 것 같았다. 내용을 대충 꿰고 갔음에도 배우들의 노래 가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난해했다. 그들이 딕션이 문제인 건지, 나의 청력이 문제인 건지 늙어가는 내 귀에 슬퍼질 판이었다. 2부는 노래 가사가 정확하게 귀에 들어오지 않아도 현란한 무대장치와 상황전개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역시 다들 가수였고 배우였다. 가수출신들이 연기를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위, 그들은 프로였다. 짝짝짝!


아마도 1부 끝무렵부터였다.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은. 거의 백수인 내가 조금이나마 하는 일이 사람 만나는 일인데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압박했다. 감기, 독감, 코로나-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병들, 내가 아파 스케줄을 펑크 내는 일들, 안된다. 절대. 집에 돌아오자마자 비타민과 두통약을 챙겨 먹고 누워있었다. 아마 초기증상이었든지 아니면, 늘 겪는 지나가는 두통이었는지 어젯밤쯤 정신이 돌아왔다. 스케줄은 훌륭히 해냈다. 아, 나란 사람. 피곤하다.


정신을 차리고 커피 한잔 들고 밖을 바라보니 가을무는 스스로 제 몸을 불리고 있다. 누가 시선을 주든 말든,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가을무는 김장철 제 한몫을 제대로 할 것 같다. 나도 다시 정신을 차려야겠다.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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