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이를 할머니댁에 맡기고 출근하는 아침이었다. “아빠, 핑크꽃!” 차를 타러 가는 길에 아이가 손가락으로 길가에 핀 꽃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분홍색 철쭉이었다. 이내 “빨간꽃!” 외치며 다른 꽃으로 달려가 조심스레 꽃잎을 만져본다. 그러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하얀꽃 어딨어?” 며칠 전, 놀이터 주변에서 본 하얀 철쭉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출근 시간은 쫓기는데, 놀이터는 우리가 가는 방향과 반대였다. 일단 차로 가는 길에 피어 있는 몇 송이의 하얀 철쭉 앞에 아이를 데려갔다. 그런데 아이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니야, 놀이터로 가자. 거기 있어.”
놀랍게도 아이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안 된다’고 할까, ‘아빠 출근 늦어’라고 할까 고민했다. 그때 어제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고다 아야의 『나무』에서 읽었던 이야기. 손녀가 좋아하는 꽃을 사주라며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에게 동전 지갑을 건넨다.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저자는, 딸이 고른 비싼 등꽃 대신 값싼 산초나무를 사왔다가 호된 꾸중을 듣는다.
“돈이 부족하면 지갑을 통째로 계약금으로 걸면 끝날 일을 너는 아비가 한 말도 자식이 어렵게 내린 선택도 헛수고로 만들어놓고 태평하게 있으니 그 얼마나 천박한 심성이냐, 게다가 등꽃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가치를 정하는 것이냐, 다소 값이 비싸다 해도 그 등꽃을 아이의 마음을 살찌울 거름으로 삼아줘야겠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느 꽃이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면 그것은 아이의 일생에 마음의 여유가 될 것이고…”
놀이터로 가서 하얀 철쭉을 보자고 하는 아이의 모습이 등꽃 나무를 고르는 저자의 딸과 겹쳐 보였다. 출근 시간과 아이의 마음을 살찌울 거름, 둘 중의 경중을 따지자면 당연히 후자였다. 그리고 아이가 하얀꽃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 꽃피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하얀꽃 보러 가자.“
내 말에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아이는 작은 다리로 놀이터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꽃 보는 게 그렇게 좋을까.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려간 아이는 하얀 철쭉 앞에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하얀 철쭉은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었다. 아이는 꽃 앞에 쪼그려 앉아 꽃잎을 만졌다. 아이는 꽃을 봐서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얀꽃이다!"
"아빠, 봐봐. 예뻐."
"아빠 만져봐. 시원해."
아침 공기에 차가운 꽃잎을 만져보며 시원하다고 웃는 아이. 아이의 웃음 따라 나도 시원하게 웃었다.
"우리 다온이는 참 꽃을 좋아하네?"
"응, 나는 꽃 좋아해."
결국 출근 시간에 쫓겨 그곳을 떠나야 했다. 아이는 자꾸만 뒤돌아보며 아쉬워했고, 나는 차를 운전하며 후회를 했다. 나도 아이 옆에 앉아 꽃을 함께 보며 색깔에 대해, 모양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나눌 걸 그랬나 싶었다.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가 꽃을 좋아하니 말이다. 고다 아야도 손주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초목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몰래 기도했다고 했는데, 나도 그랬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갓 지났을 때, 첫 나들이로 벚꽃구경을 갔었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며 속으로 기도했었다. 이 아이가 꽃과 나무, 풀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참 좋다.
사실, 나는 초목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초목을 좋아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초목을 사랑하면 나무와 꽃처럼 싱그러움과 꽃내음이 내게서도 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목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줄 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더 윤택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내 이름이 적힌 나무가 우리 집 마당에 있었으면 했고, 지금도 화분이라도 사서 꽃을 키워볼까 생각을 가끔하곤 한다. 하지만, 내 성격이 흐지부지한 탓인지 늘 생각에만 그치고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어쨌든 우리 아이는 아빠와 달라서 다행이다. 아이가 내게서 물려받지 않은 이 마음이 신기하다. 그리고 꽃이 가진 아름다움을 정확히 볼 줄 알고, 그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아이여서 고맙다. ’하얀꽃이다!‘ 하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보여주어서 고맙다.
출근하는 길, 흐지부지한 마음에서 결심이 선다. 이번 주말엔 아이와 함께 작은 화분을 사러 가자. 베란다에 작은 정원을 만들어보자. 봄꽃도 심고, 토마토도 심어 함께 키워보자. 꽃이 피어나는 소리와 함께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피어났으면 좋겠다.